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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되기를 거부했던 예술가 친레이, 그녀를 만나다.

 

 

-편집자에서, 디자이너, 교수, 그리고 화가. 그녀는 모든 것이지만, 어느 단어로도 형용받기를 싫어하는 자유스러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이다. 언제나 새로운 자신을 찾고 싶어 하고, 아직도 자신의 진정한 면모를 찾고 있는 친레이.

 

친레이는 1972년에 태어났으며, 1988년 사천예고를 나왔으며, 1993년 서남사범미술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총칭 교수로 활동을 하고 있다.

 

친레이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녀의 화실은 어느 아파트 꼭대기에 위치하여 있고, 다른 중국 성도(成都)사람들이 그렇듯이 꽃을 키우기를 매우 좋아하는 작가이다. 화실의 창가와 야외 발코니에는 각종각색들의 식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친레이는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창가 쪽의 소파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2007년 까지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말하기를 회화는 많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녀는 무엇이 보이면 그것을 즉시 그리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한명의 사람, 모두 다른 영감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마치 반 고흐처럼,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그렇게 그려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였다.

 

 

2007년 친레이가 선보인 “꽃”이라는 컬렉션은 북경의 친구의 도움으로 판매를 하기 시작했는데, 1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모두 판매가 되었다고 한다. 친구는 그녀에게 더욱 많은 작품을 진행하여 개인전을 열기를 권했지만, 자유적이고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기 싫어하는 그녀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Romain Rolland의 <미켈란젤로의 생애>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위대해 지는 것이 중요하지, 위대해 보이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이 말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거대하고 웅장한 조소 작품들과는 달리 부드럽고 연약한 그의 성격이 그의 위대함에 영향을 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나는 미켈란젤로와 친레이를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관람자를 감동시킨 다는 것은 그 둘의 공통점일 것이다. 친레이의 자유분방한 회화 세계 속에서, 그녀는 어느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도 아니고, 비유하려는 것도 아니며, 어느 문화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관람객들이 그녀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그들이 그런 아름다움과 함께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녀의 대담한 생각은 모두 예술과 관련되어 있으며, 예술의 표현 방식은 회화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그녀와 나누었던 재미있고도 색다른 인터뷰를 한번 들어보자

 

Q. 예고에, 미대를 졸업하고 방황한 기간이 길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방황기를 극복 할 수 있었나요?

 

A.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편집자가 되기를 결정했다. 예술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나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편집자 다음엔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도전해 보았다. 그때 나는 내가 이미 미술과 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오고 말았다. 새로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심미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2005년도에 내가 미술의 세계로 돌아오기 전, 나는 어떻게 사람을 그려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나는 펜을 처음 들기 시작한 그날부터 지금껏 끊임없이 사람을 그려왔다. 나는 사람을 관찰하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의 생김새, 다양한 표정, 인간이라는 동물은 아주 재미있는 동물 같다. 그때부터 인물을 그리는 일이 매우 쉬웠으며 한번 그리기 시작하면 수없이 많은 종이로 방안을 가득 채우곤 했다. 이러던 내가, 내 자신도 만족스러워 하지 못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수년간 나는 많은 것들로 인해 간섭을 받았고, 인물에 대한 나의 명료한 인식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세상에게 좌우되는 내 자신을 보고, 나는 내 자신을 다시 돌이켜 보게 되었고, 다시 나의 세상을 만들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Q.그렇게 다양한 일을 하다가 다시 예술계로 돌아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A.맞다. 07년도는 내가 제일 힘들었던 한해였다. 나는 수년간의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경험을 완전히 버리기가 싫었다. 나는 그런 요소들을 회화 속으로 대입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나 말고도 많은 예술가들이 “애니메이션” 같은 작품들을 만들고 있으며, 시장성이 매우 좋은 편이였다. 그때 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내 작품을 좋아하게 만들까를 더 걱정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바로 반성하고 멈추었다. 사실 회화는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사물과 환경을 기록하는 행위이며, 많은 생각이 필요치도 않고, 작품 속에 얼마나 깊은 사상이 담겨져 있는지 중요하지도 않다. 당신이 무엇을 그린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 자체이며 당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이 보인다면 그것을 그려라, 꽃, 나무, 사람, 모두 다른 세계를 보여 줄 것이다.

 

Q. 학창 시절은 어땠었나요?

 

A. 유년기 시절 나는 아버지 이외에는 무서워했던 것이 없었다. 집을 나가고 부터는 신비로움에 가득한 세계에 나는 그저 들떠 있었다. 나는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처럼 머릿속에 물음표로 가득했고,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미술 학원의 선생님과 학생들은 하나의 작은 사회를 구성하였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있었다. 또한 이 모든 사람들은 예술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고, 우리가 구성한 사회는 예술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예술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공간 속에서 서로 경쟁하고 서로 마찰해 가면서 자라가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그 시절의 영향은 아주 깊게 내 가슴 속에 남겨져 있다. 나는 지금도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대할 때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고는 한다. 내 생에 있어 그때가 가장 예술에 대한 정신이 고조를 향할 때라고 말할 수 있다.

 

Q. 아버지가 직업 화가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술을 전공을 하신 겁니까? 어릴 적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명확한 꿈이 있었나요?

 

A. 태어났을 때부터 어쩌면 나는 예술가가 될 운명 이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예고를 들어가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여자는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 그림은 너무 힘들다”하시면서 나를 무용을 배우게 하셨다. 하지만 첫 번째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춤추는 것에 별 흥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무용단을 나가게 된다. 그 후로 아버지는 노래와 피아노를 배우게 하였지만, 한동안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이 부모님께 이 아이는 음악성 재능은 뛰어나지 못하다는 말과 동시에, 아버지는 묵묵히 기타하나를 사왔고, 새로운 선생님을 찾아 오셨다. 이런 유년기를 보내면서 부모님은 변덕이 심한 나를 어느 곳에 정착시킬지를 못 찾고 있었다. 나는 오직 그림을 그릴 때만 안정적이었으며, 부모님은 그때서야 내 운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부모님이 나를 예고로 보낸 최초의 동기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느 목표, 이유, 아무것도 없다.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일 뿐이다.

 

Q. 같은 학창시절 동기들이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는 친구들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그 이유가 뭐죠? 그들은 학창시절 때 예술을 정말 사랑하긴 했었나요?

 

A. 회화는 예술의 한 가지 종류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미대를 나와 다른 업종으로 바꾸어 일을 하고 있는 내 동기에게 예술을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자아를 찾고 싶어 하는 학생들,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찾고 싶어 하는 학생들, 이런 대담한 생각은 모두 예술적인 사상이고 관계가 있는 생각이다. 예술의 표현 방식은 회화 한 가지뿐만이 아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 절대 때어낼 수 없는 정신적인 양식이다.

 

Q.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은, 지금 나와 별로 상관없는 일들이다”라는 주의를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이해가 되기도, 잘 안되기도 하는데요?

 

A. 만약 자신을 개선하고 싶다면 좋은 것만 간직하는 선택적인 기억력을 가지면 된다. 이전의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인생관, 가치관등을 다시 정리하고, 이전에 안 좋고, 부족했던 점은 모두 지우고 좋은 것으로 채우면 된다. 나 역시 오늘날 이런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림은 나에게 있어 내 자신을 돌이켜 볼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나는 어떻게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을지 항상 생각하고는 한다.

 

Q.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 하지 않고, 다시 이렇게 예술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A. 다시 예술계로 돌아오게 된 것은 어쩌면 마음 속 한 구석에 언제나 이런 결말이 있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네가 그림을 안 그리면 너무 아깝다”라는 말을 했었다. 내가 잠시 그림을 그렸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다시 일깨워 주었고, 나에게 다시 예술의 문을 열어주고는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전시회를 보러 다녔고, 많은 화가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는 했다.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내가 그저 이 세상에 조금 더 큰 소리를 내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회화 세계의 문은 아주 낮고 작다. 3살짜리 꼬마도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을 들어가게 된다면 수많은 계단이 기다리고 있으며, 누가 그 계단을 많이 오를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작품이라는 것은 작가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며, 회화라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초월해야 하는 행위이다.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당신의 라이벌은 당신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과 싸우는 것은 정말 어렵다. 마음이 답답하고 문턱에 막혀 있어도,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Q. 지금 현재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시는 가요? 한명의 좋은 선생님이신가요?

 

A. 나는 가끔 내 자신이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하며, 학생들도 나에 대한 반응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나쁜 선생이라고 더 많이 생각이 든다. 왜냐면 나는 교육을 해본 경험이 매우 적으며,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내 선배들을 본다면 그들은 모두 박식한 이론지식들로 무장을 하였지만, 나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하고, 그들과 얘기를 하고 있으면 이전에 나를 가르치고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신 나의 스승들이 생각이 난다. 그럴 때면 나의 한 마디가 이 아이들의 일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격스럽고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아이들을 지도하고는 한다.

 

Q. 그렇다면 회화는 어떤가요? 당신은 그림을 직업으로 그리나요 아니면 취미로 그리나요?

 

A. 만약 일생을 직업 화가로 살기를 원하는지 묻는 다면 나는 싫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그림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매우 기쁠 것이다. 그림은 취미이자 나의 사명이다. 잘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나는 확답은 못 준다. 하지만 자신은 있다. 그리고 노력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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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inlei #친레이 #중국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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