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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적인, 너무나 베이징적인 - 그 포지셔닝에 관하여

얼마 전, ‘포지셔닝 Positioning’의 저자 잭 트라우트 Jack Trout가 서울에 들렀더군요. 책이 나온지 삼십 년 가까이 지난 현재, 그 개념을 시장에 오롯이 적용하기엔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포지셔닝’이란 개념 자체는 시대를 뛰어넘는 금과옥조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케팅의 한 분야로서의 디자인을 생각한다면 디자이너들에게 있어서 더더욱 말이죠. 이번 글은 중국음식을 예로든 그 포지셔닝에 관한 이야기.

해외 여행 좋아하세요,라며 물으나마나 한 당연한 질문으로 이번 글을 시작합니다. -_-;; 어디론가 떠나기로 작정하셨다면 의례히 그 도시나 나라에 관한 가이드북을 한 두 권쯤 구입 하실 텐데요. 그 가이드북 중 실린 정보의 질로 따지자면 첫손에 꼽히는 ‘럭스 가이드(Luxe Guide)’라고 있습니다. 직접 구입해본 적은 없지만 이미 그 이름이 익숙하시다면 당신은 여행마니아, 직접 구입하셨고 또 그 책을 지니고 여행을 해 보신 적이 있다면 오오- 그대는 트렌드세터 혹은 젯셋족?!

이 가이드북은 도시별로 책이 나옵니다. 홍콩에 본사를 둔 럭스는 각 도시별로 매년 한 두 번씩 업데이트를 합니다. 그 도시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 만을 엄선한다는 모토 아래, 현지에 살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들 다수의 의견을 수렴해서 업데이트 한다는 군요. 세계에서 가장 럭셔리한 이 가이드북은 긴 종이를 리플렛 접듯이 한 아코디언 폴딩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면 허걱- 이거 가이드북 맞아,하고 분명 놀라실 겁니다. 불친절도 이런 불친절이 없게 사진 한 장, 지도 한 장 없이, 깨알 같은 영어만 보입니다. 설명은 또 얼마나 간략한지 스폿 이름과 그곳에 대한 설명 두세 문장, 주소, 전화번호, 그게 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이드북 중 톱 클래스라고 정평이 난 이유는 실패 확률 제로의 베스트들만 꼽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족집게 선생이 뽑아 준 문제만 수능시험에서 주루룩 나오는 아싸,하는 그런.

자, 이 책의 홈페이지로 들어가 보시죠.

럭스 가이드 시리즈로 나온 도시들을 한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각각의 소개 페이지는 다음 사진과 같구요. 그 도시를 상징하는 아이콘 혹은, 그 도시 하면 떠올려지는 분위기를 연출한 다음 거기에 럭스 가이드를 놓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이애미’는 해변->비키니 입은 여자, ‘밀라노’는 패션->수트, ‘파리’는 로맨틱->장미. 이 보다 더 ‘Less is More’일 수 있을까,싶게 아트 디렉터의 아이디어는 톡톡 튑니다.





럭스 가이드 발리편입니다. 남국의 이그조틱한 리조트를 잘 표현했군요.




베이징편. 금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로스앤젤레스편.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컨버터블 안이군요.




오 마이, 마이애미@! 모든 분들 19세 이상이시죠? -_-;;




패션의 도시다운 밀라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 파리. 이 도시와 어울리는 게 붉은 장미 말고 무엇이 또 있을까요.

그럼 여기서 퀴즈 하나!

‘서울’편을 설명하는 페이지에 걸린 사진은 무엇일까요? 1초, 2초, 3초…

얼핏 그윽한 칼라의 한지를 바닥에 깐 뒤, 그 위에 태극무늬 선명한 부채나, 노리개, 색동저고리, 아니면 원앙 한 쌍을 놓은 그런 사진이 떠올려집니다. 하지만 서울편 페이지를 클릭하자 뜨는 사진은, 그런 상상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리는 군요. 서울편과 같이 놓인 물건들은, 노트북 컴퓨터와 아이포드. 아, 그렇군요. 외국인들에게, 특히 럭스 가이드를 이용할 정도의 부자들에게 서울은 ‘전통의 도시’가 아니라 IT가 강한 ‘새로운 도시’쯤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딘 주니어 디자이너들이라면 누구나 심각하게 고민해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입니다. 저 역시 그땐 그랬지만, 왜 저 치들은 우리를 이해 못하는 것일까,에서 시작한 이런 고민은 결국엔 니들이 예술을 알어, 삐이익-,하며 털어 넣는 소주 한 잔과 함께 목구멍 속으로 삼켜집니다.

그런데, 심각하게, 정녕 우리는 아티스트이던가요? 디자이너는 아티스트와 달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가 아닌 그들이(클라이언트가, 더 나아가 소비자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가 절대적인 직업 아니던가요? (솔직히 제 경우에도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 당연한 진리를 깨달았답니다. 학생 작업의 클라이언트가 되고 나서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나 자신 있게 우리가 하고 싶은 말만 되뇌고,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죽어라 보여줬는 지 모릅니다. 그리곤 그들과의 관계를 바늘과 실이 아닌, 물과 기름이라고만 생각을 했구요.

사설이 길었군요. 이번 얘기는 확실하게 포지셔닝 된 중국음식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내가 먹이고픈 음식이 아니라 그들이 먹고픈 음식을 내서 성공한 그런 중국음식점에 관한 이야기랍니다.

‘따동 Dadong’이란 곳이 있습니다. 베이징,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북경오리구이, 베이징 카오야를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입니다. 길거리 간식거리가 2위엔(우리 돈 400원) 정도하는 중국에서 아무리 오리 통구이라도 198위엔(우리 돈 4만원)이라는 거금을 내기에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 그런 고급식당입니다. 워낙에 유명해서 연일 초만원입니다. 한 시간 가량 기다리는 건 예사일 정도로 말이죠. 제아무리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떨린다 해도 한 시간씩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건 고역과 다름 아니지만, 이곳 따동에선 기다리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오리구이를 장작더미에 구워내는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거든요. 로비 한켠에 마련된 음료 코너에서는 와인, 차, 주스 등의 음료를 공짜로 제공합니다. 음료를 즐기면서 오리구이 굽는 모습을 지켜보게 만들어 놓은 거죠. 지루함을 즐거움으로 만드는 그들의 퍼포먼스는 몇 십 달러짜리 뮤지컬에 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척이나 화려한 따동의 입구 모습입니다.




로비에서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 사람들.




오리 굽는 모습을 유리 안으로 들여다 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화덕이 있는 곳입니다.




화덕으로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오리들.

다 구워진 오리는 이런 식으로 몸속에 있는 기름을 부어냅니다. 그 기름양이 어마어마 하더군요. 그런 다음, 손님 상으로 향합니다.




1시간 가까이 기다린 다음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정갈하게 세팅된 모습. 수저받침도 오리 모양입니다.




잘 숙련된 요리사가 테이블 옆에서 직접 오리를 발라줍니다.

저 능숙한 손놀림!@




기다린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저와 제 아내는 각각 한마리씩. -_-;;




바삭노릇하게 잘 구워진 오리 껍질.




갖은 양념과 함께 쌀전병에 싸서 먹으면... 음음음...

‘그린 티 하우스 리빙 Green T. House Living’은 중국이 자랑하는 ‘차 tea’를 콘셉트로 한 음식을 내는 레스토랑입니다. 모든 음식에, 심지어 맥주 한 잔에 까지 방금 쪄내고, 금새 빻은 차 잎을 섞을 정도입니다. 미니멀한 스타일의 단층 짜리 건물은 온몸으로 낮엔 햇빛을, 밤엔 달빛을 받는 답니다. 덕분에 보름달이 둥실 뜬 날이면 베이징의 내노라하는 아티스트, 셀러브리티들이 모여 파티를 가진다는 군요. 아흑.





그린 티 하우스 리빙의 미니멀하기 그지없는 모습.

중국 전통 종이로 만들어진 메뉴.




잔에 담긴 음료는 맥주인데, 이 역시 재스민 차잎을 빻아 넣었습니다. 이런 느낌 처음이야,지만 상상 이상으로 잘 어울렸습니다.

깔끔한 동양적 프리젠테이션. 글래스에 담긴 모히토 역시 민트잎 뿐만 아니라 차잎도 가득 넣었답니다.





‘따리 코트야드’는 500년 역사의 후퉁(베이징의 좁다란 뒷골목)에 들어선 쓰허위엔(사합원; courtyard)을 개조해서 만든 윈난음식점입니다. 이곳을 찾아 가는 길은 지도를 들고도 풀기 어려운 수수께기 입니다. 문밖에 붙은 번지수 사인만 아니라면 그냥 지나쳤음이 분명할 이곳이 식당일까,스러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담한 마당이 우리를 반깁니다. 석류가 주렁 달린 나무 한 그루와 조그만 연못이 한 켠에 자리한 그런 마당이 말이죠. 자리를 잡고 앉아 종업원이 가져다 줄 메뉴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좀 긴듯해서 종업원에게 메뉴를 요청을 하니 별다른 메뉴가 없답니다. 그저 차려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 콘셉트. 슬몃 겁이 나서 가격은,하고 물었더니 일인당 120위엔, 우리 돈 24,000원입니다. 오랜 전통 가옥에서 맛보는 중국 음식. 덕분에 외국인들에게 아주 인기 높은 핫플레이스입니다.




후퉁의 골목길.

그 어디에도 이곳이 식당임을 알 수 있는... -_-;;




베이징의 가장 전통적인 가옥 스타일인 사합원입니다. 중앙의 마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십여가지 가까운 요리들이 차례대로 내어집니다.





‘페이퍼’는 아주 독특한 경험입니다. 말레이시아 화교인 주인장이 중국 음식과 동남아 음식을 믹스해서 코스요리로 냅니다. East Meets West라는 콘셉트로 조금씩 조금씩 예쁘게 세팅한 요리를 보고 있으면 정녕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중국 음식인가,싶을 정도로 새롭습니다. 시멘트와 하얀 페인트가 미니멀한 실내 분위기 역시 그 새로움에 한몫 거듭니다. 하지만 그것 아시잖아요. 단지 낯설기만 한 새로움은 금새 질린다는. 하지만 이곳의 음식은 새로우면서도 동시에 맛이 있습니다. (이거 의외로 맛있잖아!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식당 내에는 중국 음식을 편하게 즐기려는 외국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중국음식을 즐기려는 중국인들도 많았구요.





모던 차이니즈 퀴진이라고 쓰여있는 페이퍼의 외벽.

시멘트와 화이트 칼라가 잘 어울리는 실내.




음식들도 하나같이 실내분위기 만큼이나 깔끔합니다.





한때 종로 뒷골목 선술집 타운의 터줏대감이던 피맛골이 사라졌다는 얘기를 서울의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었습니다. 재개발 때문이죠. 피맛골이 사라짐으로써 얻는 것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특히 금전적인 면에서 얻어지는 이익은 피맛골이라는 500년 넘은 거리가 간직하던 옛 정취가 고스란히 사라짐으로써 받게 되는 상실감보다는 훨씬 더 클 것입니다. 수많은 잣대 중 자본의 잣대를 들이대면 말이죠. 금전적 이익은 쉽게 계량화가 가능하지만 추상적인 상실감은 태생적으로 계량화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특히, 마스터 카드의 그 유명한 ‘Priceless’ 광고 시리즈에 공감하는 수많은 대중들에겐 말이죠. 그런 면에서 중국적인 것을, 베이징 적인 것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여전히 아끼고 가꾸어 외국인들을 사로잡은 이 레스토랑들은 참 고무적이고 반가운 실례입니다.

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두서가 없었던 제 얘기도 결론 부분입니다. 잭 트라우트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란 나라를 일본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 비교했을 때 포지셔닝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물론 삼성전자와 LG 전자 같은 디자인 성공 사례는 우리를 한국사람으로 자랑스럽게 만들긴 합니다. 그렇지만 포지셔닝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삼성 스타일은 무언가 애매한 반면, 소니 스타일이나 애플 스타일은 확고하게 각인되어 있으니까요. 앞서 예를 들었던 럭스 가이드 서울편에서와 같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들이 듣고자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바로 그 차이일 것입니다.

질문 하나 던지며 긴 글을 맺을까 합니다. 당신의 디자인 스타일은, 디자이너로서의 당신은, 더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당신 자신은, 클라이언트에게, 소비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포지셔닝 되어 있는가요? (그러는 너는 하고 있냐,라고 되물으신다면 윗 글을 처음부터 찬찬히 다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당신의 미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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