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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최상의 디자인 그리고 인간

장마가 끝나고, 서늘한 여름이 될 거라던 날씨는 푹푹 찌고 있습니다. 이럴 땐, 푸른 하늘과 뜨거운 모래가 쌓여있는 시원한 에메랄드 빛 바다가 그립죠. 안 그래도 짜증나는 날씨에 쏟아지는 뉴스들과 쌓여가는 일들을 맥주 한 잔으로 씻어내기엔 부족한 감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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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싸고, 차에 타고... 밀려오는 일들에서 잠시 도망쳐 봅니다. 쫓기는 듯한 마음도 저 멀리 해변이 보이면, 나의 단순한 머리는 설레임으로 모든 걸 잊어버릴 테니까... 그리고 해변... 바다에 누워 동동 떠다니며 편안하게 바라보는 깊은 하늘은, 마치 우주의 거대함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착각을 선사합니다. 흐뭇하고 나른하게...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면, 행복... 파도에 엎어지고, 코 속으로 들어 온 바닷물의 매운 맛에 눈물을 찔금거리며 일어서도, 세상의 근심은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얼굴엔 만족한 웃음이 떠나질 않을 겁니다. 그렇게 아무런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함. 그 정지된 순간으로 빠져들게 되겠죠.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디자인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열려지고 연결되는, 그 생동함이 가득한 공간 속을 떠다니는 듯한 신비한 착각. 그렇다고 사이버 펑크의 ‘넷 단말 유전자’들이 얽키고 설키며 만들어내는 육중한 정보들의 시스템도 필요 없는 세상, 그냥 이렇게 존재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자연스러운 시간. 그 속에 너와 내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게 되는 경험. 그저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미소가 번집니다.
언뜻 고갱이 얄미워지네요. 그에게 더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했을까? 그가 입었던 옷과 구두, 그림물감이나 캔버스 그리고 그를 싣고 갔던 여객선은 그저 그가 그 순간 타히티에 있기 위해 존재한 단순한 물건들이었죠. 고갱에게 그 사물들 자체의 의미는 더 이상 필요 없었을 겁니다. 아비튀스나, 트리클다운, 디드로 효과 등은 더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없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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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쉽게도 일상에 돌아오면, 디자이너는 인간을 위해, 일부러 강조해서 ‘디자인’을 말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어떤 절대적인 것도, 진리나 진실도 없다면서도 서로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해야 하죠. 그렇게 우리는 자연 속에서 고립된 섬과 같은 도시와 그 속의 삶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디자인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의지, 성취와 성공을 위해... 인간을 위한 디자인은 인간에 의해 스모그 속의 북한산처럼 희미해져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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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디자인은 뭘까요? 무엇을 위해 디자인을 하는 걸까요? 간단히 생각하면, 인간의 삶을 위해서... 하지만 그 삶을 위해 디자인은 온갖 이념을 주장 합니다. 인간을 위한 생산, 혹은 인간을 위한 소비... 현재의 흐름은 문화를 이야기하며, 소비를 강조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소비는 생산을 위한 전략으로서 다루어지는 것도 현실이죠. 소비든 생산이든, 서로의 관점에서 필요에 따라, 편의에 따라, 서로의 주장은 언제나 조작될 뿐입니다. 소비자의 심리를 분석하고, 니즈를 자극하거나, 생산의 편리를 말하며 효율을 강조하지만 그렇게... 인간의 삶은 분해되고, 결정되어 자신의 삶은 조각이 난 체 버려집니다. 이젠 그 남은 파편적인 감각 속에서 흔적처럼 남겨진 인간성만으로도 감격하며 살아가야 하죠.

우리는 마이클 그래이브스의 ‘새조각 주전자’나 필립스탁의 레몬즙 짜는 ‘주시 살레프’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물을 담고 끓일 수 있는 주전자에, 장난감처럼 소리를 내는 새 조각을 얹는다는 것은 일견 유치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만들어낸 것은, 기계적이기는 해도 마치 인간의 감정과 같은 ‘반응’이죠. ‘난 여기에 있어요. 자, 이제 뜨거워집니다. 삐익~ 빨리 불을 끄고 커피 잔에 물을 부으세요.’ 더 이상 디자인은 편리한 쇳덩어리가 아니라 마치 친구처럼, 나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습니다. 마치 거미를 연상케 하는 듯한 날렵한 모습의 ‘주시 살레프’는 이렇게 속삭이죠. ‘어때, 멋있지? 이리 와서 내 머리에 레몬을 꾸욱 눌러봐. 난 기계가 아니야.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레몬즙을 감상하며 상쾌하게 한 잔 마셔봐. 넌 기계에 둘러싸인 도구가 아니야. 이 순간을 즐기라구.’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나 자신을 투사합니다. 내 맘에 맞지 않는 대답이 튀어나오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인간은 디자인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언뜻언뜻 보여 지는 조각난 감성에 만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의 자욱한 담배연기는 없지만, 충혈되고 찡그려진 눈으로 아이디어를 쥐어짜 만들어낸 디자인과 이에 대한 성취감은 공장에서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대량으로 찍혀져 나오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완성된 제품에 남겨진 약간의 인간적 감성의 흔적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욕망을 위한 소품으로 전락합니다. 디자인은 그 현상과 형상의 한 부분들에 고정된 체 그 전부는 사라지고 전인적인 삶을 누릴 기회는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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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삶의 전부, 그 자체가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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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감각의 흔적으로 조각난 형상이 된 것은, 역설적이지만, 디자인이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만들어지는 관계의 모든 것, 현실은 중학교 도덕교과서가 아니니까요. 서로 ‘나’만을 내세우며, 자신만의 가치와 브랜드의 남다름을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편과 그 반대편으로 나뉘어 서로의 주장으로 맞서 싸우고 정복해야만 합니다. 서로에게 그런 힘이 없다면, 다음 기회를 위해 서로 타협 할 뿐입니다. 그렇게 소비자는 각각의 ‘이념’들에게 조목조목 분석되어, 각 부분으로 조각나 나누어집니다. 그러나, 브랜드나 아이덴티티가 강조되는 것은 서로 기억하고 인지할 수 있는 인격적인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홀로 남겨진 내가 아니라, 서로 확인하고 확인 받을 수 있는,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을 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문제가 되는 것은 소비자를 가운데 둔, 삼각관계와 같은 이 사회의 구조 때문일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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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말 중요한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너’는 언제 어디서나 ‘이미’ 존재하고 있죠.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대상’ 자체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 ‘대상’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관계’의 의미입니다. ‘나’와 ‘너’라는 관점만으로는 서로를 구분하고 위계를 만들고, 그 질서를 지키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죠. 사회 조직이라는 정치적 공간에서 이런 구분은 서로를 비난하고 무너뜨려 어느 한편을 말살하거나 복속시킬 뿐입니다. ‘대상’이라는 것, 그것은 하나의 단위로서 ‘나’를 위한 혹은 ‘너’를 위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힘들죠. ‘대상’이라는 독립된 요소는 각각의 주체로서 가지는 ‘의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서로 간의 대치와 인정은 있어도 서로간의 진정한 존중이나 사랑은 없습니다. 아쉽게도 우리의 문명은 그런 식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몇 만 년 전부터 그랬고, 2000년 전 사랑이 시작된 이후로도 지금까지 그런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그다지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문명의 형성은 그 문명을 이루는 구성 요소로서의 ‘대상’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이 서로 부딪치고 협력하면서 만들어가는 ‘관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불국사나 만리장성, 피라미드나 쾰른 대성당이 그 문명의 어느 한 개인이나 계층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각각의 ‘대상’들이 접하게 되는 모든 것, 기후와 지형 등의 자연과, 그 속에서 이루어져 왔던 사람과 사람, 집단간의 교류와 기억 속에서 그 모든 의지들이 뒤섞여 형성된 ‘관계’를 흔적으로 남겨놓은 기념비들이 아닐까요? 아쉽게도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관계’ 자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을 위한 ‘대상’으로서 바라보며 ‘관계’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랬기에 기술이 발전하면서도, 점점 더 그 ‘관계’가 통제되고 조작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화’나 ‘헤게모니’의 개념은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나타날 만큼 문명의 통제가 강화되었다는 반증일지도 모릅니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그 ‘관계’가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 숨겨진 미디어의 힘을 드러내고 인정했기 때문이겠죠.

디자인도 그렇게 조작의 수단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요즘의 세상은 변형된 파시즘과 프로파간다의 시대가 도래 하는 듯이 보이죠. 하지만, 디자인은 제품에 남겨진 인간적인 감성의 흔적들이 보여주듯이, 그렇게 간단히 수단으로서 이용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행위 자체이니까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그 인간성이 가려지긴 해도 감추어지지는 않죠. 그리고 단지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 관계의 매개가 되는 자연의 모든 것들을 함께 아우릅니다.
인간을 위한 디자인... 아마도 디자인은 자연과의 관계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렇게... 단지 도구로서, 인간을 위해 소모시켜도 상관없는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겠죠. 하지만, 그러는 동안 인간도 하나의 ‘대상’이 되고 서로 자신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사회는 고도의 조직화와 정보화가 진행된 상태라고 정의되고 인간의 소외는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유비쿼터스’가 진행될수록 현재는 미개한 사회로 역사 속에 남겨지고, 미래는 현상적 ‘유토피아’가 도래할지도 모르지만, 가장 위대한 디자인인 ‘자연’을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한, 디자인은 여전히 문명을 위한 하나의 기술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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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변에 앉아 지친 몸을 햇볕에 태우며, 노곤해진 몸을 스치고 가는 나른한 바람을 즐깁니다. 수박 한 조각을 베어 물면,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그 순간에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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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부질없는 이야기를 나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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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시지프스는 영원하고...
내일은 저도 그 곳에 끼어들기 위해 초라한 모습으로 어물쩡거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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