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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그려내는 디자인

눈을 뜨고, 하품을 하고, 이불 속에서 몇 번 꼼지락거리다가 일어나 밥을 먹을 때까지... 그 정신없는 시간 속에서도 내 손에 잡히고, 보이는 모든 물건들은 디자인이라는 것을 거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새로 산 가방이나 구두에 대한 설레임은 없지만, 비몽사간에 밝은 햇살을 받으며 맡는 이불의 냄새와 방안의 분위기는, 한 주 만에 찾아온 일요일의 여유와 함께 내 살갗을 자극하며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게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나를 위한 소중한 감각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 감각들을 충족시킬 경제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현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겠지만... 내 맘에 들 정도로 멋진 것인지, 내 성격과 맞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인지가 제품을 구매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디자인의 감각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만들어 집니다. 현대의 디자인은, 시대의 사회, 문화, 경제가 반영된 미의식의 표출이라고 해도 되겠죠. 미의식은 이제 더 이상 예술적 감각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사이에 디자인은 현대의 의식과 감각들을 발현시키면서 예술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죠. 결국, 디자인의 감각이라는 것도 디자인의 미적 완성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감각의 우열에 대해 가치를 매기고 서열을 만들게 됩니다. 사실, 디자인의 질이라는 것을 어떤 특정한 잣대로 측정한다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지만, 우리는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디자인들을 가치 매기고, 우열을 가리며 살아가죠. 그런데, 디자인의 가치를 매긴다는 것은 과연 누가 하게 되는 것일까요? 제품을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들? 디자이너? 소비자? 매스미디어? 아마 그 모두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닐까요? 간혹 가다 보여 지는 매스미디어의 프로파간다적 성향이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로서 작용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작은, 표면적인 힘의 움직임으로 보일 뿐입니다. 미디어의 힘이란 삶이라는 것, 그 삶이 표출되는 디자인이라는 거대한 현상을 빙산의 일각처럼 조금 보여주는 정도이겠죠.

미디어의 작용은 한계가 있습니다. 허상을 만들어 낸다 해도 90퍼센트의 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허상으로 남을 뿐입니다. 디자인에 내재된 가치가 없다면, 디자인은 단순히 만들어진 제품일 뿐, 미디어의 도움을 받거나 일류 디자이너의 평가를 받는다고 해도, 사회적 힘을 가질 수는 없겠죠. 디자인은 단순히 심미적 현상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미적 완성도로 그 디자인의 가치가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심미성은 단지 사회적 계층을 구별 짓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지도 모릅니다. 디자인은 오히려 삶 속에서 삶의 방식이 만들어 내는 현재의 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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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지났지만, 지난 4월, 성곡 미술관에서는 ‘JAPANESE DESIGN TODAY 100' 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현대 디자인과 전후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디자인 제품들이 전시되었었습니다. 일본의 디자인, 일본의 삶을 대표한다는 총 100여 개의 제품들을 볼 수 있었는데, 전등갓이나 해드폰에서부터 신칸센까지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을 모아 놓았더군요. 편안하게 생활 속에서 접하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듯한 느낌, 하지만 그만큼 친숙한... 일본 디자인의 영향을 너무도 강하게 받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이국적이라거나 새롭다는 느낌보다는 익숙하고 반가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더 선명하고 확실한 느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가 명확하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과의 차이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일본의 이미지라는 컨셉에 맞추어 걸러진 디자인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디자인에 담겨진 이야기는 확실히 우리와는 다른, 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전시된 제품들은 정제되어 차분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일본만의 디자인들이었지만 차갑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독일의 디자인이 형상을 이념화함으로써 인간미가 좀 부족한 것 같다고 느끼는 편입니다. 일본의 디자인은 플라스틱과 스틸의 감각 속에서 인간적인 형상을 찾아내고 이야기를 담아내는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마치 외계인의 얼굴처럼 보이는 나카마치의 CD player나 아즈미 신의 ‘snowman' 식기는 그 형상 자체로 인격을 부여받은 듯 합니다. 하다 히로시의 세탁기는 마치 만화 케릭터처럼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비자연적인 재료에 대한 거부반응을 친근함으로 대치시켜 버립니다. 사물의 기능을 생각하지만, 사물을 단순한 사물로 보기보다는 나를 채워주는 그 무엇으로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각각의 부속품들이 가지는 기능의 연관성에 대해 좀더 깊게 관찰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그렇게 그들만의 관점에서 디자인을 하기에 그것이 타 문화와의 ‘다름’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보자기에 쌓인 노트북, 사실 보자기 문화는 일본보다는 우리가 더 앞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어느새 보자기는 일본의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노트북을 덮는 일본의 첨단 소재로 세계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어쩌면, 단순한 발상의 전환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발상의 전환을 의도적으로 이끌어내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그건 그저 삶의 방식으로, 소니의 이동식 텔레비전이나 워크맨처럼 생활 속에서 자신의 필요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것을 디자인의 질적 향상으로 이야기하며,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표본으로 추출하고측정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질적 향상이라는 것이 계측되고, 질서정연한 것이라기보다는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 그 의지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이전에 디자인된 켄모치 이사무의 ‘easychair'는 마치 가에타노 페쉐의 ’up series'를 연상시킵니다. 아르누보나 모더니즘과 같은 흐름으로 이야기 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그저 예외적인 것처럼 치부되겠죠. 하지만, 삶에 대한 방식으로서의 디자인을 이야기 한다면, 통계를 위해 버려지기 보다는 그 자체로 귀중한 유산이 되어 삶 속에 남겨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대담론이 아니라, 그 흐름 속에서 각자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의지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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