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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라는 이름의 연극과 디자인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나 끝나지 않을, 아름다운 이야기... 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약간의 고달픔과 아쉬움이 섞인, 커피 한 잔에 담배 한 모금 같은 이야기들... 시니컬한 아이러니가 가득한 이야기들을 만들어갑니다. 이제는 더 이상 80년대식의 성공스토리를 믿는 사람들은 없지만,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기위해서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일하고 소비해야 하는 현대의 연극에, 마치 사이코드라마의 배우처럼 참여하고 있죠. 대중은 아직도 ‘모던타임즈’의 양떼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당시, 대중의 삶을 향상시켜 만인의 행복을,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꾸던 디자인도, 현대 소비시장의 형성과 함께 단순히 판매고를 올리기 위한 장식이 되어갑니다.

이제는 그냥 보통명사화 되어버린 ’well being", 이 단어는 보다 더 안락한 삶을 지향하기 위해, 현대 사회의 복잡함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 남는 여유를 통해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을 지칭하던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well being"은 어지간한 헬스클럽과 음식점 광고에는 다 들어가는 카피로 전락해 버렸죠. 이제 사람들은 오히려 그 ’well being"을 위해 더욱더 분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웰빙이라서 더 비싼 그 많은 음식들과 헬스클럽, 요가 정기권을 끊기 위해서는 더욱더 열심히 일을 해야겠죠. (이 땅에 ‘로하스’가 들어오면 그땐 또 어떻게 변형이 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한국의 ‘well being’이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경험들은 과연 올바른 ‘well being"일까? 어떻게 보면 단순히 한국의 보신문화와 그 환상이 만들어낸 해프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광고주들에게는 확실한 키워드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광고주나 제작자의 입장에서 볼 때,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경험뿐입니다. 그 경험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 보다는 오직 그 경험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소비자의 지갑을 열 수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죠. 결국 인간의 감각과 인식조차 소비자들이 지불할 능력만 된다면, 획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되어 버리고, 인간 자신은 소외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모든 현상들은 진실(마치 사탕발림한 어린이 감기약처럼)이 되고, 마치 연극과 같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는 현실이 됩니다. 마치 미국인이나 영국인이 봤을 때,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잡종 영문 간판과 상호들처럼... 단지 영문이기에 그 뜻을 알 수 없지만, 외국의 문자라는 이유로, 선진적이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신뢰와 숭배의 대상이 되죠. 하지만 아쉽게도 국적불명의 영문 간판과 상호들은 매우 토속적인 한국문화로서, 한국인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작동합니다. 현재의 한국을 보여주는 한국적인 이미지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요즘 한글로 된 간판과 상호가 많아지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사회에서 신뢰에 대한 이미지 보다는 상호나 간판에서 명확한 그 회사만의 존재감이나 친근감을 요구하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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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그리고 2차원의 이미지들은 그렇다지만... 내가 숨쉬고 느낄 수 있는 공간, 현장은 과연 있는 그대로, 보여 지는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까? 그냥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거나 시간을 때우기 위한 곳이었던 학교 뒷골목의 카페들마저 이제는 브랜드를 내세웁니다. 소비자의 취향이 고급화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고급화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현실은 별 반 차이가 없죠. 내가 브랜드를 가진 카페에 들어가 상대방과 마주앉아, 괜히 에스프레소를 홀짝여도 문제는 똑같습니다. 브랜드의 이름아래 그 브랜드만의 차별화되고 정형화된 서비스를 받아도 에스프레소는 똑같이 쓰기만 할 뿐이죠.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가격과 서비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브랜드가 하나의 인격체처럼 느껴진다는 것 이외에 그 브랜드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브랜드가 더 해 졌다는 것 때문에, 나는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카페, 내가 좋아하는 공간의 느낌과 빛을 찾아왔다는 것 이상의 경험, 새로운 세상에 앉아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내가 앉은 공간, 나와 이야기하는 상대,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더 잘나고, 더 존중받고, 더 즐거운 듯한 느낌을 받게 되죠. 그러나 진실은?
만약, 내가 중국의 어느 거리를 걷다가 ‘스타벅스’에 들어간다고 치죠. 커피를 마시면서, 기분 좋게 상하이에도 ‘스타벅스’가...’하며 커피를 홀짝이다가, 얼핏 고개를 돌려 유리창에 붙은 ‘스타박스’라는 로고를 보게 된다면? 그러나 ‘스타박스’를 보지 않는 한 나는 ‘스타벅스’에 앉아 기분 좋게 커피를 마시던 기억만을 가지게 되겠죠. 과연 진실일까?

‘소비자는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통해 경험을 사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산다.’라는 견해는 현재의 소비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죠. 더 이상 나는 나로서 존재할 필요도 없고, 그런 노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클릭 한 번으로 ‘앰피오’나 ‘아이팟’을 주문하면 ‘앰피오’나 ‘아이팟’의 이미지, 이 이미지에 대한 나의 동일시가 바로 나의 이미지가 되어 버립니다. ‘폴크스바겐’을 사는가, ‘미니’를 사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취향과 성격이 규정되어 버리죠. 내가 ‘나’일 필요는 없습니다. ‘스타벅스’의 분위기가 ‘나’의 전부이죠. ‘스타박스’라는 로고를 보지 않는 이상, 내가 앉은 곳은 ‘스타벅스’이고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진짜 ‘나’는 그곳에 없으니까요. 그저, 내가 접할 수 있는 제품의 수만큼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늘어나고, 어떤 면에서는 내가 어느 정도의 제품까지 소비할 수 있는가에 따라 ‘나’의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나는 나일뿐이야’라고 외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제품들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계획할 때 그 디자인이 소비자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게, 표현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니까요. 하지만, 덕분에 현재의 디자인은 본래의 목적 보다는 그 평가의 척도로 작용하는 면이 커 보이기도 합니다. 브랜드를 만들고... 그 브랜드의 이미지를 유지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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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는 브랜드를 통해 그 제품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덴티티는 곧 자신과 동일시되죠. 명품이라는 것이 동양권에서는 환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동양권은 아직 소비의 주체가 되어 진정으로 ‘소비’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어쩌면 일본조차도...) 동양은 이제 겨우 ‘세계의 공장’이 되었을 뿐이죠. 아는 것이라고는, 제품이 아닌, 오직 그 제품의 브랜드 가치뿐입니다. 실제 그 제품의 가치보다는 그 제품에 붙여진 마크가 어느 브랜드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물론 브랜드의 가치는 디자인이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디자인을 만들어낸 마케팅 때문에 형성된 것이기는 합니다. 디자이너는 오퍼레이터가 되어 자신의 감각을 팔아야 하죠.
하지만 요즘은 마케팅을 위한 디자인 보다는 디자인 그 자체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크를 통해 확인되던 브랜드가 각종 불법복제품에 의해 그 브랜드의 가치를 위협받게 된 현실에서 브랜드는 마크를 버리고 오직 제품의 질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시킵니다. (즉, 그 제품이 진품임을 알아볼 수 있는 눈, 원 재료의 특성과 그 브랜드의 미적 성향 등을 분별하고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소비할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들 보다는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그 브랜드를 소비함으로써 그런 안목과 능력마저 돈으로 사버리겠지만...)
결국, 그 도도한 태도에 제품의 가격은 더욱 올라가고... (원자재는 그렇다치고... 미적성향은 어떻게 가치를 매기게 될 까요? 순수하게 그 미적 가치에 대한 가격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사회 문화적인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돈으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있을까?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것이겠죠.) 제품들이 자신의 순수한 기능을 떠나 사회 문화적 의미로서 작용할 수밖에 없기에 만들어지는 전략이지만, 어쨌든 디자인이 마케팅이 정해주는 형태를 벗어날 수 있는... 디자이너가 경제적 고려만하는 마케팅에서 벗어나, 자신의 디자인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디자인의 주도권이 디자이너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디자인의 순수한 기능과 이념보다는 사회적 가치에 따라 디자인이 결정된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가치가 어떤 것인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있는지에 따라 디자인도 변하니까요. 하지만 디자인이 스스로 이 사회에 의미를 제시하지 못한 체, 단순히 사회의 가치에 좌우된다면 이전에 마케팅을 위한 오퍼레이터가 되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나이키 운동화의 경우 단순한 디자인에 싼 가격의 제품들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강북에서는 그런 신발이 자주 눈에 띄죠. 그 가격에 비해 더 좋은 디자인과 품질을 자랑하는 브랜드가 있어도 나이키를 찾는 이유는 제품자체 보다는 그 제품에 박혀 있는 마크가 줄 수 있는 ‘만족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10살 전후의 아이들은 하루에 몇 달러라도 벌 수 있게 해주는 그 ‘만족감’에 감사하며 계속해서 나이키 신발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능적이고 멋있는 신발을 디자인하는 것만 생각했던 디자이너에게 이런 사회적 윤리문제를 제시해야할까? 이 사회가 디자이너에게 단순한 오퍼레이터가 되도록 강요당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디자이너로서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디자인은 이런 사회적 구조(위의 나이키가 보여주는 것은 너무도 하찮은 예이겠죠. 일제식민지 시절, 한국의 농민들을 수탈해 가지고 간 쌀을 통해 자국의 하층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시키고, 여기서 남는 이윤을 통해 제국주의적 계층 사회를 만들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던 일본의 우익들을 생각하면 더 쉬우려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또 다른 사회적 페러다임을 제시할 수는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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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서, ‘소비’가 과연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에 의문을 표합니다. 예전에는 ‘나는 행복하다’ ‘고통스럽다’등 자신의 행동을 이야기하던(자신의 삶을 파악하고 규정하기보다 행동함으로써), 실존적 삶을 살던 인간들이(존재적 실존양식), ‘나는 행복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 등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자신을 규정하게(소유적 실존양식)되었다는 견해는 디자이너도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소비’되어지고 있는 명사형, 그 제품들을 디자인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현재의 우리모습, ‘소비’를 감각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디자인’이라면, 디자이너의 손을 통해 ‘소비’를 대신할 그 무엇을 표현해 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내가 가진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내가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요? 물론 그것은 소비자가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지만, 디자인도 그 옆에서 소비자의 ‘존재적 실존’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

전 지구적인 환경파괴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으로서의 디자인은 소비자들을 변화시킵니다. 아직까지도 까다로운 과정과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환경친화적 제품들에 소비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디자인이죠. 디자이너들이 이 지구라는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지구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하면, 조금은 과장된 것이긴 하겠지만... 디자이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죠. 다만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하게 한 가지 이론에 얽매여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고 사회, 문화적 침투나, 간섭에 대해서도 자유롭지도 못하기에 사회전반에 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준비는 해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에서 디자인은 아직까지 이전의 페러다임에 안주하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 뜨고 있는 ‘문화’라는 키워드가 대중적인 힘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디자인이 문화에 대해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서울중심에서 수도권의 변두리까지 나가다보면 이 동네는 우리 동네의 5년 전 모습, 저 동네는 10년 전 모습, 20년 전 모습이라고 느끼고는 합니다. 어느 마을이던지, 번화가나 도시의 모습도 모두 비슷한 형식으로 발전하고, 오직 개발속도에 따라 발전과 낙후가 평가되죠. 각자 그 지역만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발전하기 보다는 그저 발전된 모델, 성공한 모델을 따라갈 뿐입니다. 실패가 두렵기는 하지만... 이론적 기반마저 준비되지 않은 건지... 어느 고장, 관광지를 가더라도 볼 수 있는 비슷한 모양의 토산품들이 결국은 일본식 케릭터가 박힌 제품들로 획일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디자이너로서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을 그저 생뚱맞은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겠죠.

P.S.
사실 디자이너가 가진 힘은 보잘것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캔슬 되자, ‘당신 이거 즐기면서 했잖아.’ ‘일개 프리랜서한테...’ 등의 소리를 들으며, 돈을 떼이는 일이 있었죠. 이 사회가 비열하다는 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 사회는 디자이너를 그저 매출을 올리기 위한 도구 이상으로는 보지 못 하는지도 모릅니다. 디자이너가 그 이상을 하기도 어렵고...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오퍼레이터로서 살다가, 40이후의 인생을 걱정하면서 지내기엔 억울할 것 같네요. 게다가 요즈음은 디자인 회사도 카운슬러나 컨설팅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데...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만이라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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