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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포장, 특집 : 제13회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전람회 - 38호. 1978.07.01.

디자인포장

특집 : 제13회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전람회

38호. 1978.07.01.

한국디자인포장센터


목차

 

이치영, 디자인 개선을 위한 전문 기업 육성을

명태현, 전시 과학 ②/디스플레이 계획

장권봉, 온타리오 소도시 디자인 계획 ③

차성철, 일본 산업 디자인 개발과 사조의 흐름 ②

안대식, 신제품 개발 계획 ②

임영주, 한국의 전통 문양/한국의 금속공예

차성철, Action offrce 연구 자료 2 / Action office의 대두

김종오, 색채로 팔리는 패키지 ①

권명광, 광고 시평 시리이즈 1 / 카아피를 중심으로 본 문제작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전람회의 어제와 오늘

백철

상공부 중소기업국 지도과장

 

1966년에 제1회 대한민국 상공 미술 전람회를 개최한 상공 미전은 10년이 가까운 기간이 지나는 동안 디자인 창안 기풍을 조성하는 메 선도적 역할을 다해 왔다. 그러나 현대 디자인의 경향은 미술적인 경지를 벗어나 과학을 겸비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점과 전통적인 미술 전람회의 영역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전람회의 명칭 및 성격을 변경시키는 제도 개선의 움직임이 1974년에 있었다.

한국 디자인 포장 센터 주관으로 “상공 미전 제도 개선 심의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1977년 8월 22일에는 한국 디자인 포장 센터 회의실에서 장성환, 하진필, 한기성, 김현기, 최문기, 조영제, 백태원, 박대순 등 제씨가 참석하여 제1차 회의를 시초로 수차에 걸친 회의를 개최하고 그 결과를 상공부에 건의하기에 이르렀으며, 상공부는 보다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몇 명의 사계 또는 관련 기관에 질문서를 보내어 의견을 받아 종합하였었다.

종합된 의견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람회 명칭을 개정하여야 한다. '대한민국 상공 미술 전람회'를 '대한민국 디자인 전람회'로 개칭하여야 한다. 미술이란 표현이 본 전람회의 목적에 부적합할뿐더러 디자인이란 표현이 세계적으로 보편화 된 용어이며 본 전람회의 목적에 부합되고, 전람회의 과학화를 지향하기 위해서도 시대에 적응한 명칭을 계몽·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출품 부문을 추가 신설하고 명칭을 변경하여야 한다. 현행의 상업 미술 부문 · 공예 미술 부문 및 공업 미술 부문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시각(視覺)디자인 부문·공예 디자인 부문. 공업 디자인 부문 및 환경 디자인 부문으로 구분하여야 한다. 상업 미술을 시각 디자인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은 상업 미술이란 표현이 모호하여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고, 환경 디자인부를 신설하는 이유는 디자인 분야가 환경 디자인분야까지 확대되고 있는 세계적 경향으로 금후 디자이너들의 커다란 역할이 기대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세째, 초대 작가 제도를 신설하여야 한다. 현행 제도에는 추천 작가 제도가 있으나 그 작품을 심사할 권위 있는 작가 제도가 없으며, 신진 작가와 원로 작가의 구분이 없어 추천 작가로 일괄 취급하고 있으므로 디자인계의 계서 (階序)가 확립되지 않는다. 또한 초대작가 제도는 작품의 질적인 향상과 디자인전의 체제 확립에 기여할 것이다.

네째, 추천 작가상 수여를 제도화하여야 한다. 제9회 상공 미전부터 추천 작가상을 수여하고 있으나 시상 근거가 없이 시상하고 있으므로 이를 규정하여야 한다. 추천 작가상의 수여는 중견 작가(中堅作家)의 개발 의욕을 고취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다섯째, 출품수를 작가 1인당 각 부문마다 3점으로 제한하고 있는 현행 제도를 철폐하여야 한다. 많은 출품을 장려하는 의미에서 출품수의 제한은 철폐하여야 한다 등이었다.

이상과 같은 요지를 골자로 한 '대한민국 상공 미술 전람회 규정의 개정(안)'을 만들어 절차를 밟았으나 환경 디자인부의 설치에 대하여는 고속 도로 및 도시환경을 관장하는 건설부와 소관 사항의 문제가 명확치 않아 보류되는 상태가 되었었다. 장시간의 휴면 기간을 거친 후 1976년 4월 13일 한국 디자인 포장 센터 회의실에서 상공 미전 제도 개선 소위원회를 열고 하진필, 한기성, 유광열, 민철홍, 이은규, 필자 등이 참석하여 환경 디자인 부문 신설 문제는 일단 보류하기로 하고 명칭은 '대한민국 산업 디자인 전람회' 로 '디자인' 앞에 '산업'이라는 악센트를 두기로 하였다.

상공 미전의 내용이 실용화와 수출에 기여하도록 하는 희망을 어느 궤도에 오를 때까지 강조하고자 1차·2차·3차 산업을 망라하는 경제학 용어를 첨가하도록 하였었다.

다시 절차를 밟게 되었으나 또다시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는바, 법령의 제정이나 개정을 할 때에 체제를 검토하는 기관에서 “1976년 5월 17일자로 심의를 요청한 대한민국 상공 미술 전람회 규정 중 개정령(안)은 그 내용이 규정의 명칭을 위시하여 '상공 미술'을 외국어인 '디자인'으로 개정하는 것이 주요 골자로 되어 있는바, 이는 정부의 국어 순화 방침에 배치되는 것이므로 적절한 우리말로 바꾸어 표현함이 타당하다고 사료되어 일단 반송하오니 선처하시기 바랍니다”는 의견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어문 행정을 관장하는 문교부에 의견을 문의한바, “디자인이란 용어는 우리말로 적합한 표현이 없어 교육 과정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회신하오니 참작하시기 바랍니다”고 되어 1976년 9월 18일 (편집자註: 1976년 7월 5일자 현직 김희덕 이사장 취임]에 대통령령 제8249 호로 '대한민국 상공 미술 전람회 규정 중 개정령'이 공포됨으로써 '대한민국 산업 디자인 전람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1977년도에는 제 12회 대한민국 산업 디자인 전람회를 한국 디자인 포장 센터 상설 전시관에서 개최하게 되었었다.

지난 수년 동안의 산업 디자인 전람회의 개최 요강 내용의 변천을 보면, 1976년 (제 11회)에는 시상 부문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은 1백만 원의 부상(副賞)과 해외 연구 시찰 추천의 부상을 위시하여 국무 총리상·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상. 상공부 장관상까지는 시상금과 해외 연구 시찰 추천의 부상을 주는 등 모두 3백만 원의 시상금과 5명의 해외 연구 시찰을 추천하여주도록 하였었다. 장소는 덕수궁 안 국립 현대 미술관을 임대하여 개최하였고, 지방 이동 전시는 예산 관계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1977년의 제 12회 전람회에는 대통령상의 부상은 시상금을 150만 원으로 인상하고 시상금의 총액을 430만 원으로 늘렸으며, 해외 연구 시찰 추천은 중소 기업 협동 조합 중앙회장 수상자까지 모두 9명에게 혜택이 가도록 늘렸다. 시상금과 해외 연구 시찰 추천의 수가 증가된 것은 모두 출품자의 의욕을 고취시키는 노력이었다고 보며, 특히 해외 연구 시찰 추천을 계속 늘리는 것은 우수한 수상 디자이너들이 선진국의 디자인계를 연구하고 시찰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금년 6월에 개최된 제 13회에는 최고상인 대통령상의 경우 2백만 원으로 시상금을 다시 인상시키고 총액은 750만 원으로 제 12회 때보다 320만 원을 인상시켰고, 수상자 중 해외 여행 추천 인원은 특선자까지 확대시켜 45명 이상으로 늘렸으며, 출품 디자이너들의 의욕을 고취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아 왔다.

전시장의 규모도 덕수궁 내의 국립 현대 미술관을 임대하여 전시할 때는 4백 평 미만이었던 것이 1977년의 제 12회 때부터는 한국 디자인 포장 센터의 자체 전시관을 확보하여 개최하게 되었으므로 450여평 내외까지 늘려 전시하게 되어 전시장의 협소로 겪던 애로는 없어지게 되었다.

지방의 디자이너들과 산업계를 위하여 실시하는 이동 전시도 부산 · 대구에서 광주·대전 지역까지 확대.전시하게 되었으며, 총전시 기간은 6월 1일부터 8월 말까지 3개월여 동안 전시하게 되었다.

 

 


산업 디자인전의 의미와 공과

장윤우

성신사대부설 산업미술연구소장

 

산학일체 (産學一一體)의 표본으로 수출 상품 및 국내 디자인 개량을 목표로 창설된 '대한민국 상공 미술 전람회'는 11회의 연륜을 쌓은 1976년 9월 18일자로 '대한민국 산업 디자인 전람

회'로 개칭되었다.

제1부 시각(視覺) 디자인부, 제2부 공예 (工藝)디자인부, 제3부 공업(工業)디자인부로 나뉘어져 1977년도 제12회전에는 총응모 작품이 1,573 점이었다.

심사 위원장인 권순형(權純) 교수는 “초창기의 미술 대학 학생층의 출품에서 양적으로는 줄었으나 일선 디자이너로 압축된 질적인 성장”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올해의 제 13 회전도 예년과 같이 성황이었다. 1백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우리에게 당면한 커다란 과제의 하나가 디자인 개선임은 말할 나위도 없게 되었다. 외제의 모방이나 표절이 아니고 참 우리의 것을 제시하고 세계 속의 코리어를 심어 줄 때가 성큼 다가선 것이다. 우리의 상품이 우리의 이미지를 가지고 떳떳하게 세계 시장을 석권해야 할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산업 디자인전이 가지는 의의가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고 “이대로 좋을 것인가”를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움직이는 세계, 날로 변해 가는 유행과 디자인 감각, 그리고 기능성(機能性)에 대처하는 문제를 떠안은 디자인전은 관전 (官展) 형식인 산업디자인전 말고도 꽤나 된다. KSID 라든가 한국 디자이너 협의회, 산업 미술가 협회, KSGD, KSCD, 동아 공예 대전(東亞工藝大典), 우수 농가공 개발 상품전, 전국 각 미술 대학의 그룹전, 개인전 등등...

기업체의 디자인실도 판촉(販促이라든가 여러 가지 형태로 강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 디자인은 단순한 설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사활이 걸려 있다. 아이디어에서부터 설계·판촉 · 데이터 · 경영 · 사후 관리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것을 조립하고 책임을 갖는다. 따라서 디자이너의 개념도 미(美)의 조리사인 동시에 사회적 기술자이고 조직자로 나아간 것이다.

좀 무엇하긴 하지만 국전(國展) 공예부(工藝部)를 생각해 보자. 국전의 전신(前身)이랄 수 있는 선전(鮮展)에 공예부가 생긴 것은 제 11회인 1932년부터였다. 강창원 등 한국인이 나전칠기 · 도자기·민예품 등을 출품하기 시작하였고, 제 23회 (1944.5)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예인들이 참여하였었다. 해방 이후 국전 공예부에는 디자인까지 포함해서 많은 작가들이 노력을 기울이고 새로운 작가들이 속속 탄생되었으나, 여기에도 문제점은 없지 않았다.

이경성(李成) 교수의 『한국 현대 미술사』공예편에 따르면, “7회 때부터 눈에 띄게 위축된 공예는 일반 입선 작가의 한정된 공예 의식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맴돌고 있는가 하면, 이순석(石)의 돌취미는 예술이 아니고 애무를 일삼는 취미적인 것으로 굳어져 가는 것 같고, 김재석 (金在奭)의 도자기는 무던히도 재주가 없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보여줄 따름이고, 김진갑(甲)의 나전칠예도 완전한 매너리즘에 빠져 청신한 맛은 하나도 없고, 박성운(朴星云)의 목공예품(木工藝品)도 노력과 성실에 비해 소질의 유무를 의심할 지경이다. 근 10년 같은 심사 위원의 같은 기준과 같은 취미 밑에서 자라 온 국전 공예는...... (중략) 안이한 타협과 협상의 시장으로 화하였다. 극언하면 동화(東貨) 백화점 일층 토산품 판매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명패만 국전이라고 높이 내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했다.

제 27회 봄 국전을 보자. 지난 4월 21일 발표된 제3부(書藝.四君子)와 제4부(工藝建築.寫眞)의 입상 작품들을 놓고 “갈수록 초라해지는 국전”이라고 지상에서 혹평하였다.

어째서 그럴까. 국력은 갈수록 신장되고 예술 중흥을 표방하는 정책인데, 유일한 관전 (官展)으로서의 국전, 특히 공예 부문인 봄 국전이 혹평을 면치 못하는 것은 어디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오늘의 한국 공예 디자인과 공업 디자인계를 주도하는 인사들의 대부분이 이 곳의 관문을 통해 나왔거나 통하고 있는 것으로 필자는 안다. 이 분들에 의해 미래의 한국 공예 디자인과 공업 디자인계를 걸머질 인재들이 무럭무럭 커가고 있음도 사실이다. 물론 국전 공예의 성격과 개칭된 산업 디자인전의 방향이 다름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길지 않은 한국 공예 디자인의 역사를 살필 때 국전 공예가 걸어 온 자취가 반드시 바람직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제도(특히 심사 방법)의 바뀜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난제를 앞으로도 안고 가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전통의 현대화인지 탐미(美)와 아류(亞流)의 형성인지 확고 불멸한 기준이 아쉬운 채 국전은 벌써 노쇠한 숨을 가쁘게 쉬고 있다.

참신하고 선도적인 산업 디자인전, 국력과 더불어 세계 만방에 펼쳐야 할 막중한 인재들의 등용문으로서의 이 전람회는 어떤가. 제 13회 전까지 이끌어 옴으로써 뿌리를 늘이고 기반을 다진 공을 치하하고 싶다. 특히 불모의 공업 디자인이 환경 개선과 수출 증대로서의 일익을 담당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대통령께서는 '미술 수출(美術輸出)'이라 격려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공적을 내세움보다는 앞으로도 연면할 거국적 행사이기에 이 시점에서 다시 진단해야 할 요인은 없는가 숙고하고 싶다.

한 가지만을 제언하려고 한다.

심사의 과정이다. 산업 디자인전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시각 · 공예 · 공업의 세 디자인부로 대별되어 있다. 제1부에는 Commercial design 으로서의 poster, packaging, lay out, DECOMAS visual communication의 다양한 매체가, 제2부에는 product design 으로서의 목(木)·금속·초자(子)·섬유· 플라스틱 도자(陶磁) 등 입체 작품이, 제3부에는 양산(量産)과 경제성, 전통과 창의, 기능과 시장성 (市場性)등의 전자·산업 제품이 출품자의 기량을 총동원하여 자웅을 겨루게 된다.

입상작의 어느 것은 기업화되기도 하고, 산학 협동(産學協同)의 좋은 본보기로 후학들에게도 일조가 되는 것이다.

디자이너로서의 관문 통과, 교직자는 연구 경력의 일환으로, make money 등 필요한 목적이 있기에 출품자는 제일 먼저 누가 심사할 것인가에 관심을 쏟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이치이다.

대체로 추천 작가급에서 부문별 권위자가 심사를 떠맡게 된다. 그렇다고 보면 대개 누구가 이번에 심사할 것인가가 부각되게 마련이다. 어느 분은 도자공예에 권위급이니까 무슨 경향이 유리하다. 어느 분은 염직 (染)에는 전혀 생소하니까 이번에는 불리하다. 이 분은 은사(恩師)이니까, 그분은 자기 직계 (直系)에만 손을 쓰신다, 등등 별별 루우머가 돌게 된다.

심사 위원 선정 때나 입상작 결정에도 표대결은 불가피하다. 표를 많이 모으는 사람이 심사에 참여도 하게 되고, 또한 최고상 입상 등 표의 힘은 막강하다.

“젊은 친구가 고약해. 은사도 몰라 보고 표를 가지고 나를 막 몰아 붙이는군. 새로 심사에 참여한 위원을 놓고 푸념하는 얘기다. 구더기 무서워 된장 못 담그랴마는 문제는 심각할 수가 있다.

평생을 두고 외길을 파도 눈이 겨우 떠질까말까 한다는 노작가(老作家)의 겸손(?)한 말씀이 되새겨진다. 예컨대 흙과 유약 (釉藥)과 불의 싸움. 이 분은 돈도 가정도 친구나 세속적인 것은 전혀 관심 밖이다. 다른 도작가(陶作家)의 작품을 대할 때도 지극히 망설인다. 함부로 평을 못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창작 세계를 자기 나름의 취향과 편견으로 혹 욕되게 하지 않을까 저어해서이다.

그런가 하면 유약의 발색 과정도 모르는 젊은 목공예가(木工藝家)가 일언지하에 매도해 버리는 것을 본다. 섬찟하다.

모르니까 전공 이외의 분야는 외면해 버리는 심사 위원도 있지 않을까. 만사를 제쳐놓고 제자의 작품 제작을 도와 주는 심사 위원도 계시는 것 같다. 내것을 밀기 위해서 상대의 주장도 쉽게 받아들이는 이런 일은 없을까.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고, 이런 일은 늘어놓아 보았자 치부만 보일 뿐 하루 아침에 양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출품자 자체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랴.

제언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심사 위원 구성 방법을 고쳐 보십소사 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심사 위원 자격 규정을 바꾸어 사계의 권위자라면 어느 곳에 가서도 모셔올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 몇 사람 중에서 뽑아야 된다는 구태의연한 아집에 잡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무학(無學)의 석공 (石)이랄지라도 평생이 돌과의 싸움이었다면 돌에 대해서만은 어느 이론가보다 더 친근하다. 염료(染料)만을 다룬 사람이 돌의 유현한 세계를 어떻게 외람되어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되면 자연히 심사 위원 구성은 제한 없이 그 분야의 전문가만이 참여하여 진지하게 이루어 나갈 것이다. 누가 심사 위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풍문도 해소될 것이고, 출품자는 자기의 작품에 솔직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라는 긍지를 지니게 된다.

둘째는 출품작을 분류 (예비 심사)한 뒤에 출품의 양 질量.質)별로 심사 위원수를 위촉함이 어떨까 한다. 여기에는 사전 분야 예선을 위한 관리 위원 (가칭)쯤이 필요할 것이고, 매회의 심사위원 위촉을 위한 운영 위원 (고문 역할이 위원은 수시로 변하되 업계 · 학계 · 일선 디자이너·주관처 등에서 많은 인원을 위촉하여 이들이 추천하도록 한다)과 공개 심사 원칙이 있어야 할 줄 안다. 그리고 재학생의 출품에는 제한을 둠이 바람직하다.

세째, 추천 작가제. 이것이 만능이 아니라는 기본 입장을 밝혀 둠이 어떨까. 벽을 헐어 버리고 한 작가의 실적이나 연륜으로 볼 때 초대하고 싶은 경우에는 수시로, 또 추천 관문을 들어선 작가라도 작품이 미흡하면 출품 보류를 (이는 고문·심사·관리 위원 등의 확대 회의에서 의결)함이 앞으로 수없이 늘어 갈 추천 작가의 수를헤아릴 때 숙고하여야 될 과제가 된다고 본다.

봉직 기관에는 정년이 있어도 작가에게는 은퇴가 없다. 순수 예술과는 또 다른 차원의 산업 디자인계, 샤아프하고 기민한 아이디어와 센스를 요청하는 분야인 바에야 원로원 (元老院)도 아닌 이상 무언가 정리 방법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적인 규모의 전람회는 오늘과 내일의 수준을 갖기 위해 보다 합리적인 하부 구조를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 아침의 고식적인 생각은 물론 막대한 투자만으로도 살려지지는 않는다. 옛날의 수공적 (手工的) 공방(工房)이 관아 수요를 대기 위해 존재했던 것과 같이 오늘의 과학 기술 연구소가 초현대적 조직으로 국가의 힘에 의해 운영되는 산업 발전의 기초인 것에 비추어 오늘의 디자인 공예가 어떤 형태로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국가적 뒷받침으로 현대적 형태의 공방(工房)이 전국 곳곳에 있고, 젊은이들이 몸과 마음을 불태울 수 있을 때, 굳이 산업 디자인전에만 쏟는 과잉된 열기가 진정되지 않을까 본다.

 

 

* 내용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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