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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GINA, 판도라의 상자 02 _ 박해천

지나GINA, 판도라의 상자 02


글  박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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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연재 글의 질문을 이어받아 역사 속으로 눈을 돌려 보자. 일단 눈에 띄는 것은 모더니즘 건축의 창세기를 기록한 지그프리트 기디온(Siegfried Giedion)이 1941년 펴낸 <시간, 공간, 건축>이다. 흥미롭게도 기디온은 이 책의 맨 앞 자리에 투시도법의 역사적 형성과 건축적 활용에 관한 챕터를 배정한다. 13세기에 이탈리아 시에나 지방의 회화들에서 그 맹아적 형태를 드러내고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에 의해 정교하게 수학적인 형태로 정식화된 투시도법을, 무려 다섯 세기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언급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기술 혁신을 얼개로 삼아 당대 건축의 최첨단을 짚어보는 자리에서 말이다. 일단, 건축에 관심 있는 누구라도 손쉽게 이야기하듯이, 표면적으로 보자면, 모더니즘 건축의 조형적 혁신은 테크놀로지와 디자인의 긴밀한 상호작용의 결과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기디온이 보기에 이 상호작용은 무엇보다도 '투시도법'의 모델링 인터페이스에서 발생한 사건이기도 했다. 미래의 디자인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발명된 지 500년이 넘은 구닥다리 도구의 중요성을 언급하다니, 시간의 최첨단을 질주하기를 욕망하는 모더니스트에겐 약간 김 빠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래된 모든 것이 다 낡은 것은 아니었다.

르네상스 이후, 투시도법은 디자인 프로세스를 건물 시공 및 판매와 분리시킴으로써, '건축가'의 등장을 촉매했지만, 그리하여 건축가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증명할 수 있는 디자인의 토박이 언어로 자리매김했지만, 그것만으로 투시도법의 역사적 임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투시도법은 자신만이 지닌 유클리드 기하학의 시뮬레이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 채, 지난 500년 동안 제 역량의 일부만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기디온이 보기에 이렇게 투시도법의 저주받은 운명은, 유리, 철근, 콘크리트 등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한 동질적인 신재료의 발명을 거치면서 극복 가능한 대상이 되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디자이너 혹은 건축가가 투시도법의 상상력에 의지해 종이 위에 그려낸 가상의 대상을 실제 인공환경의 일부로 실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재료 기술의 한계로 인해, 그릴 수 있더라도 만들 수 없는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재료의 발명은 평면에 갇혀있던 디자이너의 상상력을 현실 세계로 끄집어내 현실의 대상으로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발터 벤야민(WalterBenjamin)의 지적대로, 증기 기관차가 이동하던 철로는 대량생산된 철강 재료가 최초로 조립 가능한 형태로 활용된 사례였다. 이러한 철로는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인공의 신소재들이 앞으로 떠맡게 될 임무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재료들은 투시도법의 가상현실과 실제 세계의 인공환경을 연결하는 교통의 매개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디온이 주목한 것은, 투시도법에 내재한 기하학의 논리가 이 철로를 질주하며 현실 세계로 쏟아져 나오면서 모더니티의 혼돈을 일소하고 시각성의 평형 상태를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도시나 건물 같은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점차 일상 사물의 미시적 차원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초기의 대표적 사례는 인공 재료에 대한 선호를 스스럼 없이 내비쳤던 바우하우스 교수진들이었다. 그들은 가구 제품을 디자인하는데 목재 같은 자연 재료가 아니라 인공의 금속 재료을 활용함으로써, 사물의 기능을 합리적으로 구현할 묘책을 고안하는 동시에 '장식 미술'과의 과감한 단절을 꾀했다. 다른 한편, 제 2차 대전 후 가속화된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의 제품 디자인에서 금속 재료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플라스틱이었다. 사실 플라스틱이 제품의 외장재로 상용화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플라스틱은 기존의 장식적 스타일을 흉내거나, 목재 같은 자연 재료의 질감을 모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와 같은 독특한 플라스틱의 사용법은 금속 재료가 막 활용되던 19세기 중반에 차가운 금속성에 대한 반발로, 식물성 장식을 내세웠던 아르누보와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1950년대에 타퍼웨어로 불리는 부엌용품들이 단순한 형태와 파스텔 색채로 가정주부들의 인기를 끌면서, 플라스틱의 재료적 속성을 온전히 미적으로 구현하려는 디자인 실험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 실험들의 한복판에는 이탈리아의 올리베티(Olivetti)사와 독일의 브라운(Braun)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브라운이 면도기부터 오디오에 이르기까지 가정용 제품 분야에서 엄격한 기능주의 노선을 취하며 다분히 금욕적인 형태의 디자인을 만들어낸 반면, 올리베티 사는 사무기기 분야에서 기하학적 형태의 디자인을 근간으로 유희적인 요소를 덧붙였다. 특히 올리베티 미학의 핵심은 '플라스틱의 건축술'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당시 대부분의 사무기기들은 내부 기계 장치를 감추기 위해 덩치 큰 박스의 형태를 취했다. 하지만 올리베티는 기본적으로 탈-박스 형태의 디자인을 견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클리드의 공리를 벗어나는 무리수를 두진 않았다. 언제나 비례의 원리를 강조하면서, 정교하게 기하학적 표면들로 건축적 매스를 조합해냈다. 그리고 그 표면 위에는 세련된 배색과 유희적인 디테일을 서명처럼 남겼다.

사실 이러한 '플라스틱의 건축술'은 올리베티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디자이너 대부분이 건축가로 교육받은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올리베티의 사무기기들은 자신의 자태보다는 자신이 놓여질 사무 공간에 주목했다. 온갖 사무자동화 기계들에 의해 점거 당할 운명에 처한 사무실을, 화이트 컬러의 일상이 영위되는 일상의 환경으로 변모시키는 것, 이를 위해 올리베티의 사무기기들은 ‘소형 건축물’로서 그 환경의 공간 질서를 구획하고 시각적 활력을 불어넣었다. 올리베티의 접근법은 이탈리아 반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후 대서양을 건너, 또 다른 건축가 출신의 미국인 산업 디자이너 엘리엇 노이에스(Eliot Noyes)의 손을 거쳐 IBM의 디자인 요체로 군림했다.


그림 1.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의 발렌티네 (올리베티, 1969년)
소트사스는 이 디자인에서 "반-기계적인 기계"라는 테마를 구현하려고 했지만, 투시도법의 기하학적 원리와 건축의 구축적 특성을 활용해 조형의 논리를 전개했다. 소트사스가 의도했던 이 타이프라이터의 '반-기계적인 기계'로서의 특성은 매스나 형태보다는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이렇게 '건축적 형태와 감각적 디테일'을 절묘하게 결합하는 접근법은 모더니즘 미학을 추종하던 디자이너들이 일반적으로 추종하던 노선이기도 했다. 적어도 애플의 아이맥iMac의 등장 이전까지는.


그림 2. 엘리엇 노이에스의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IBM, 1964)
현대 도시의 축소판으로서의 사무환경, 커튼월 건축의 미니어처로서 컴퓨터.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의 수정궁에서 모더니즘의 건축물들을 거쳐 IBM의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일련의 흐름들은 투시도법을 모델링 인터페이스로 활용하면서, 유리와 철근, 콘크리트, 그리고 금속 재료와 플라스틱 등 다양한 인공 재료들을 실험하고 투시도법에 내재한 기하학적 논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색한 결과였다. 주지하다시피, 그리고 이 흐름은 197,80년대 일본의 전자업체들이 워크맨을 비롯한 소형 전자제품의 디자인을 통해 실험한 경박단소의 미학을 거쳐 최종 종착지에 도달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사물들의 디자인 상당부분이 바로 이 계보도의 영향권 안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스 뱅글의 지나는 이 계보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만일 지나가 '스킨'의 표면장력에 힘입어 형태와 기능의 건축술을 멀리서 우회하고 있다면, 이는 어떻게 가능했으며, 또한 어떤 잠재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우리가 기디온의 논리를 따라간다면 가장 먼저 주목해봐야 할 것은 지나의 '스킨'을 가능케 한 모델링 인터페이스, 투시도법의 유클리드 기하학과는 전혀 다른 조형의 알고리즘을 탑재한 모델링 인터페이스의 역사적 출현이다. 주지하다시피 그 주인공은 컴퓨터그래픽스다.

(계속)
* 다음 글은 10월 15일 업로드 예정입니다.


박해천_디자인연구자

디자인 연구자. 한국 과학기술원 산업디자인학과의 박사 과정에 '아직도' 재학 중이며, 홍익대, 국민대 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여전히' 강의한다. <디자인앤솔러지>(공역), <인터페이스: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접근> 등을 번역했고, <한국의 디자인: 산업, 문화, 역사>, <한국의 디자인 2: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 <디자인플럭스 저널 01: 암중모색>등의 책을 기획•편집했다. 단행본으로는 <인터페이스 연대기: 인간, 디자인, 테크놀로지>를 펴냈다.

Tag
#투시도법 #모더니즘 #신재료 #건축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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