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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남이 뜰 줄은 몰랐다 _ 장진택

초식남이 뜰 줄은 몰랐다



글  장진택

초식남이 뜰 줄은 몰랐다. 남자는 모름지기, 먹을 것 없으면 맹수라도 때려 잡아야 하는데, 풀 뜯어먹고 사는 초식남이라니. 이렇게 나약한 남자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반대편에는 이름만으로도 엽기적인 건어물녀가 있다. 이 인간도 초식남만큼이나 기존 상식을 훌쩍 뛰어 넘는다. 밖에서는 일 잘하지만,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누워 리모콘을 쥐고 쥐포, 오징어 등의 건어물이나 빨아 먹는다. 이렇게 한심한 여자는 또 어떻게 살까.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고, 여자가 여자답지 못한 초식남과 건어물녀의 출연에 대해, 전문가들은 과열 경쟁과 경제 위기를 원인으로 꼽는다. 치열한 경쟁을 피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초식남과 건어물녀의 생활은 주로 자신의 공간에서 소박하게 이루어 진다. 낮에는 각각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이것부터가 회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다. 또한 퇴근과 함께 집에 들어와 자신만의 생활을 즐긴다. 퇴근 후 동료들과 어울리거나 이성을 만나는 것은 꽤 드문 경우다. 자신만의 시간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초식남의 대표적인 모델은 KBS 월화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의 주인공 조재희(지진희)다. 그는 주로 집에서 프라모델을 만들거나 직접 요리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혼자 살면서도 하루가 꼼꼼하게 채워져 있고, 먹는 음식도 하찮지 않다. 또한 누구에게 방해 받기를 싫어한다. 장문정(엄정화)이 애완견을 잠시 맡기러 왔을 때도 처음에는 단 번에 거절했었다. 가까스로 애완견을 건네 받은 후에도 목끈을 묶어 베란다 밖에 내놓는 인간이다.

자기 자신이 중요한 초식남은 아무 물건이나 사지 않는다. 자신의 취향, 자신의 존엄성, 자신의 즐거움, 그리고 또 하나의 자신을 구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쓰는 인기 품목은 자신의 정체성이 발휘되지 않으므로 피한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다 되는 첨단 디지털 제품은 건조하고 재미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또 피한다. 성능 좋고 가격 좋고, 애프터서비스까지 좋아도 확 끌리는 매력이 없으면 손을 내밀지 않는다. 한 마디로 머리를 굴려 구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장만하는 인간이다.


그림1. 베스파 GTVa 2009년 형

또 하나의 특징은 초식남이라는 호칭에 맞게 육식적인 것, 마초적인 것, 한 마디로 남성미가 줄줄 흐르는 물건을 피해간다는 것이다. 남자라면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나 가와사끼 로드 바이크를 탈 것 같지만, 이들은 곱상하게 생긴 베스파 스쿠터나 혼다 벤리 같은 경량 클래식 바이크를 찾는다. 자전거도 바퀴가 굵고 여러 장비가 달린 MTB를 피해 접어서 가방에 넣을 수 있는 미니 벨로 아니면 얇은 바퀴에 브레이크까지 달리지 않는 초경량 자전거를 탄다. 자동차도 근육질 실루엣에 걸출한 엔진이 달린 붉은색 스포츠카보다 경량 엔진에 작은 몸집을 지닌 경차를 선호한다. 하지만 그냥 도로에 흔한 마티즈나 모닝 같은 국산 경차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는 외국산 경차를 집요하게 찾아내서 탄다. 


그림2. 다혼 미니벨로

전자제품을 구입하는 안목도 남다르다. 기존 남자들이 예쁜 것보다 기능에 집착했던 것과 달리, 초식남은 기능보다 예쁘고 멋진 것을 찾는다. 여러 모로 불편해도 아이팟 클래식을 사고, 10만원이 넘는 아마다나 대나무 이어폰을 낀다. 카메라도 캐논이나 니콘은 평범해서 피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라이카를 사던가, 아니면 종이를 접어 만든 핀홀 카메라의 불편함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집에서 요리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주방용품에도 관심이 많다. 하지만 이것도 시장에서 잘 팔리는 제품을 피해 구석에서 어렵게 찾아내는 경우가 많다. 그냥 접시가 아니라 “무슨무슨 영화에 나온 로얄 코펜하겐 무슨무슨 접시라야만 해”라고 말하곤 며칠씩 이베이를 뒤져서 구입한다. 그 접시가 도착한 날은 집에 빨리 가서 새로 산 접시에 샐러드를 올려 먹으며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싱글족을 위해 만들었던 토스터기 겸용 전자레인지 따위의 다기능 대량생산 가전제품은 디자인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초식남의 소비는 효율과 보편성에 있지 않고 편애와 자만에 있기 때문이다. 운동을 즐기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남들 스키나 보드 타러 갈 때 탁구장을 가질 않나, 남자들 좋아하는 축구 이야기에는 끼지도 못하면서 철 지난 배구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다. 

 
그림3. 아마나다 대나무 이어폰

초식남이 좋아하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면 세 가지의 키워드로 함축된다. 편애, 고집, 그리고 친환경. 한 번 사랑에 빠진 제품은 무덤까지 함께 들어가는 편애, 한 번 꽂힌 제품은 기필코 찾아내고야 마는 고집, 그리고 초식남이라는 호칭에 걸맞는 친환경적인 감성이다. 그리고 어딜 봐도 기존 남성성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딱히 여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중성성이 중심에 있다. 대량생산, 고기능, 좋은 품질 등으로 달려 왔던 이 시대 제품들과도 동떨어져 있다. 한 마디로 남자답지 않은 남자, 기존 남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남자들이다. 지금이야 얼마 되지 않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초식남적인 남자가 더더욱 많아질 전망이다. 그 중 가장 큰 걱정은 이들의 결혼관이다. 자신을 너무 중시하기 때문에 이성에 공들일 일 없고, 그래서 결혼할 필요성은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성을 만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헌신과 봉사를 가진 남자들의 사랑이 아닌 재미와 취향에 의한 만남 정도이긴 하지만.

반대편에 있는 건어물녀도 만만치 않다. 이들의 삶은 워낙 귀찮아서 복잡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과 멀리 한다. TV는 나오면 그만이고, 컴퓨터는 영화 다운로드 받는 인터넷만 되면 된다. 휴대폰도 유행과 상관없이 통화만 되면 3년이고 4년이고 갖고 다닌다. 소비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소극적이니 이들을 위해 디자인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남성관은 귀찮은 존재일 뿐, 자신이 씹어 삼키는 건어물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도 좀처럼 결혼하지 않는다. 큰 일이다. 혼자 사는 남녀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그리 행복한 그림은 아닌 것 같다.


장진택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한 때 기아자동차 디자이너, 한 때 월간 [디자인] 기자, 한 때 [모터트렌드] 기자,  지금 [GQ]기자. 참 많이 옮겨 다녔고, 조만간 회사를 또 옮길 예정이데, 이번엔 정말 오래 다닐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GQ]기자라서 디자인 칼럼을 거의 쓰지 않는 가운데 <한겨레> 신문에 '디자인 옆차기'라는 이름으로 다소 삐딱한 디자인 비평 칼럼 비슷한 것을 쓰고 있다.

Tag
#초식남 #건어물녀 #편애 #고집 #친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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