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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바꾸는 디자인] 응급실 폭력을 줄이는 디자인

생활을 바꾸는 디자인

응급실 폭력을 줄이는 디자인

영국의 응급실 서비스 디자인 사례

 

 

병원에서 발생하는 의료진에 대한 폭력 행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요즘이다. ‘의료인 폭행방지법’에 관한 논의가 나올 정도로, 병원 내 폭행 사건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나 예기치 못한 급성 질환이나 사고 환자를 다루는 응급실에서 이러한 폭행 사고가 잦다. 응급실의 의사와 간호사는 위중한 환자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한편, 때로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의 폭력이나 폭언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를 디자인의 시각에서 접근하여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다. 디자인이라고 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더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유무형의 대상을 아우르는 경험을 다루는 디자인이 점점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름하여 ‘서비스 디자인’, ‘경험 디자인’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그렇다면 응급실에서의 폭력을 줄이기 위해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의료진이 폭력에 노출될 때, 의료인의 기본 인권뿐만 아니라 다른 응급 환자의 치료 기회마저 박탈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응급실 폭력은 심각한 문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응급실의 진료 체계는 물론 이용자의 경험을 폭넓게 사유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응급실에서는 왜 화가 날까?


응급실에 환자가 도착하면 접수와 함께 상태 초진, 중증도 분류, 엑스레이(X-ray), MRI 등 추가 검사를 거쳐 최종 진단과 치료가 이뤄진다. 이 모든 진료 과정이 매끄럽게 연결된다면 좋겠지만, 긴박하게 돌아가는 응급실에서는 과정 중간중간에 피할 수 없는 긴 ‘대기 시간’이 발생하기 일쑤다.

응급실의 진료는 선착순이 아니라 생명이 위태로운 순서를 우선으로 한다. 그런데 환자마다 자신의 상태가 가장 심각하고 위급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한다. 의료진이 판단하기에 당장 처치를 요하지 않는 상태라면,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실제 치료를 받기까지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뜻이다.

 

 

이제 환자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모른 채 계속 아픈 상태로 치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환자는 의료진이 자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치료가 이유 없이 지연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나게 되고, 결국 극단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 대기 시간은 의료진과 환자가 직접 대면하지 않는 시간을 뜻한다. 응급실의 폭력을 줄이는 디자인을 위해서는 의료진이 환자를 대면하여 치료하는 과정뿐 아니라, 직접적인 의료 서비스가 이뤄지지는 않는 이 대기 시간에도 주목해야 한다.

 

 

영국 공공의료체계와 응급실 운영 현황


영국은 1946년부터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의료체계인 국가의료서비스(NHS, National Health Service)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이 비용 일부를 국가에서 지원하고 나머지는 환자가 부담하는 것과 달리, 영국의 NHS는 암을 비롯한 각종 수술 및 치료는 물론 치과 시술까지도 포함한 포괄적인 진료에 드는 비용 전액을 지원한다.

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무상의료체계이다 보니, 어떻게든 적은 비용과 인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영국보건부와 NHS에서는 효율적인 의료 서비스를 위해 ‘디자인’을 활용하는데 상당히 관심을 둔다. 응급진료 과정과 응급실에서 벌어지는 폭력 역시 디자인 대상이다.

 

 

영국 응급실의 문제는 NHS가 지닌 고질적인 문제와도 상통한다. 개인 비용 부담이 없는 만큼 NHS공공병원은 의료 공급보다 환자 수요가 많고, 그 때문에 환자가 실제 진료를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실제로 종합병원 내 여러 과에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 복합질환 환자의 경우 진단에만 최소 한 달에서 두 달이 걸리기도 한다.

물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종합 병원에 가기 전에 동네의 지역보건의(GP, General Practitioner)에게 일차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병이나 상처가 중하다면 상급병원의 응급센터로 가는 방법도 있다. 아무래도 곧바로 치료받을 수 있다 보니 응급센터 이용 비율이 높은 편이어서, 안 그래도 악명이 자자한 영국의 진료 대기 시간은 응급실에서도 길어진다.

 

 

응급실 폭력을 줄이는 디자인 해법은?


2년에 걸쳐 영국의 응급실 내 폭력 실태를 조사해 보니, 영국 공공병원 응급실 연간 이용자가 2,100만 명이 넘었는데, 위협과 조롱을 포함해 매년 59,000건의 물리적인 폭력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숫자는 지속해서 늘어나는 추세였다.

이렇게 응급실 폭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인건비와 파손된 기물의 수리 및 재구입비, 경호 설비 충원 등에 투입되는 NHS 기금만 연간 최소 6,900만 파운드가 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의료 종사자가 환자로부터 폭행이나 폭언을 당하는 경우 그때마다 최대 5일까지 병가가 가능한데, 폭력 사태가 잦아지면서 대체 인건비 부담도 상당히 커졌다.

 

 

이런 응급실의 잦은 폭력 사고 발생에 위기의식을 느낀 영국의 보건부(Department of Health)에서는 기금을 조성해 디자인 진흥기관인 디자인 카운슬(Design Council)에 응급실의 폭력 실태 조사를 통한 응급실 폭력의 원인 분석과 응급실의 의료 서비스 개선 작업을 의뢰했다. 그리하여 400시간이 넘는 조사를 통해 왜 환자들이 공격적이 되는지, 그리고 어떤 타입의 환자가 더 공격적으로 반응하기 쉬운지의 분석이 이뤄졌다.

응급실에서 폭력을 유발한 환자군을 술에 취한 사람처럼 겉보기에도 폭력적인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사람들과 그 외의 평범한 사람들로 나누어 분석해 보니, 뜻밖에도 평범한 환자군에서 더 많은 폭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폭력 발생의 수순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명확하고 효율적인 정보와 안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응급실에서 보내는 대기 시간에 대해 불만이 생기고, 이런 불만이 환자의 불안과 고통과 합쳐지면 인내심을 잃고 또 쉽게 의료진에게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위와 같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디자인 카운슬에서는 안전한 응급실 진료 환경을 만들기 위한 디자인 해법을 공모했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디자인 사무소인 피어슨로이드(PearsonLloyd)의 ‘더 나은 응급실(A better A&E)’ 프로젝트다.

 

환자가 응급실에 들어와서 받게 되는 치료 단계를 순서대로 안내한 개념도

 

영국의 런던과 사우샘프턴에 있는 두 곳의 공공병원을 대상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서, 피어슨로이드는 환자와 보호자의 불안을 줄이고 의료진에게는 안전한 진료 환경을 만들기 위한 해법을 디자인했다. 먼저 환자를 위해 응급실의 상황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안내 패키지가 개발되었다. 응급실 내 진료 과정을 ‘접수, 평가, 치료, 결과’의 네 단계로 나눠 환자가 현재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또 응급실 내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와 같은 정보를 안내한다.

 

응급 진료 개념도를 안내하는 리플렛(왼쪽). 벽에 부착된 응급실 지도(오른쪽)

 

다소 심각한 상태의 환자를 치료하는 곳임을 알리는 패널과 침상(왼쪽). 노란색으로 벽면을 칠해 다른 침상들과 시각적으로 구분해 놓은 심각한 응급환자를 위한 소생실(오른쪽)


환자가 응급실에 들어오는 즉시 응급실 안내 리플렛을 배부, 앞으로 진행될 진료 과정과 평균적인 대기 시간을 안내했다. 그리고 각 진료과와 복도에 안내판을 붙여 환자 본인의 상태가 중증 응급으로 분류되었는지 아니면 심각하지 않은 상태로 분류되었는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했으며, 침대 바로 위 천정에도 안내판을 붙여 누워서도 상황을 알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편 응급실 대기실에는 응급실 내 상황을 나타내는 실시간 정보를 모니터에 띄워 응급실 혼잡도와 그에 따른 치료 지연 등을 바로바로 전달했다.

 

응급실의 각 공간별 역할에 따른 치료 과정을 설명하는 공간 안내 패널들, (왼쪽부터) 접수실, 대기실, X-레이 검사실, 심각한 상태의 환자를 치료하는 소생실, 환자들의 응급상태를 확인하는 진단실, 심각하지 않은 환자를 치료하는 응급 치료실

 

공간 안내 패널을 벽과 천장에 붙인 공동 침상 공간(왼쪽). 통로에서 공간 안내 패널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심각하지 않은 상태의 환자들을 치료하는 침상 공간(오른쪽)

 

대기실 벽면에 부착된 실시간 응급실 상황 안내 모니터. (왼쪽부터) 응급실 혼잡도, 각 치료 단계별 환자 현황, 환자별 응급 정도에 따른 대기 시간 안내 화면.

 

 

한편 스마트폰용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여 응급실 방문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변 응급실 위치와 혼잡 상황 등을 실시간으로 제공하여, 특정 병원으로만 환자가 몰리지 않도록 했다.

 

주변의 NHS 응급실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의료진을 위해서는 폭력적 성향을 보이는 환자군에 대한 대응법을 효과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리서치 결과를 알기 쉽게 정리한 응급실 안내서를 개발했다. 더불어 응급실 현황 기록판을 만들어 설치하였는데, 의료진은 이 보드에 응급실 현황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토대로 정기적으로 의견을 나누어 더 발전적인 의료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의료진을 위한 응급실 운영 환경 개선 프로그램 단계별 개념도

 

응급실 현황표와 단체 토론 중인 의료진

 

 

디자인이 가져온 응급실의 변화


피어슨로이드의 해법을 시범 시행한 결과, 75%의 환자가 대기 시간 동안의 불만이 줄어들었다고 답했으며, 그간 응급 의료진을 괴롭혔던 비물리적 형태의 폭력 발생 빈도는 이전 대비 50% 수준으로 낮아졌다. 비용 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유의미한 결과를 거둔바, 서비스 디자인 투자 비용 £1당 응급실 폭력으로 발생하는 비용 £3가 절감되는 효과를 거뒀다.

이런 극적인 성과에 탄력을 받아 보건부와 디자인 카운슬에서는 응급실 환경 개선 프로젝트를 영국 전역의 공공병원으로 확대 시행할 예정이다. 처음 시행한 병원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패널의 색깔과 재료를 바꿔 더 저렴한 비용으로 디자인을 적용할 것이라고 하니, 비용 절감 효과는 더 커질 전망이다.

프로젝트의 확대 시행과 함께 영국 디자인 카운슬에서는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사례를 안내하는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제작하는 등 공적비용의 효율적인 운용에 디자인이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를 대중에게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디자인 카운슬에서는 영국의 보건부와 NHS와 함께 응급실 폭력 관련 프로젝트를 비롯해 치매와 성병, 헌혈, 환자의 존엄성과 같은 의료서비스와 관련된 사회적 문제의 해법 마련을 위해 헙업 중이다.

 

 

응급실 폭력을 줄이기 위한 영국의 서비스 디자인 사례는 관행이라 여겼던 절차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관해 디자인의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실질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의료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기에 환자들에게 알리는 데 소홀했던 진료 절차와 응급실 현황 정보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환자들은 기다림에 화를 내지 않게 되었고, 의료진은 안전해졌다. 거기에 극적인 비용 절감 효과는 디자인으로 불필요한 사회적 재화의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확인시켜 준다. 더 기능적이고 아름답도록 디자인되는 것은 제품만이 아니다. 디자인으로 만들어 낸 더 효율적인 서비스는 원래의 기능에 더 충실하고 사회적으로 더 아름답다.

 

발행일 : 2015. 0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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