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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1944~)


이상철

- 사진: 최광호

* 자료제공: 이가스퀘어

 

어떤 뒤안길

 

2008년 5월 디자이너 이상철을 처음 만났으니 그를 두 번째 만나기까지 여섯 번의 겨울이 지난 뒤였다. 작은 체구에 동그란 안경테 그리고 신사다운 상냥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하지만 시간은 어떻게든 지나온 흔적을 새긴다. 그는 오랜 둥지였던 종로구 운니동의 가든타워를 등지고 필동에 있는 해인빌딩으로 옮겨와 있었고, 이제 막 회의를 뒤로 하고 온 탓인지 과거보다 어딘가 더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변화는 발언의 수위에 있었다.

 

그에게 언제나 따라붙는 꼬리표는 한국 1세대 아트디렉터. 잡지 <뿌리깊은나무>와 <샘이 깊은물>의 아트디렉터로서 활동했던 이상철에게 그만큼 이력을 대표하는 설명도 없다. 지난 몇 년 간 디자인 매체들이 그를 다소 다른 각도로 소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디자이너들의 기억과 마음 속에 그는 한국의 첫 아트디렉터이자 한국 현대 잡지 디자인의 장을 연 장본인으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의 디자인계가 그에게서 바라는 ‘딱 그만큼의’ 이상철의 입지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국의 첫 아트디렉터’라는 역사적 사실과 존재감이었고, 이상철은 그 사실의 당위성을 위해 필요했던 산증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과거의 이상철이다. 현재의 그는 그 어떤 디자이너보다 절박했다. 발언의 수위는 높아졌고, 발언의 톤은 아주 진해졌다. 그는 토하고 또 토했다.

 

이 글은 이상철을 따라다니는 ‘한국 최초의 아트디렉터’라는 수식어를 잠시 옆으로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프로젝트 프로듀서라는 수식어를 놓고자 한다. 

 

 

1976년 3월 창간되고 19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잡지 <뿌리깊은나무>의 표지 및 내지.

* 자료제공: 월간 <디자인>

 


(좌) 1984년 11월 창간되고 2001년 11월에 휴간한 잡지 <샘이깊은물>의 표지. 
(우) 샘이깊은물체를 위한 기본틀 
*자료제공: 월간 <디자인> 

 

산업화의 최전선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한국이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에 들어서던 즈음, 이상철 또한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첫 직장을 갖게 되었다. 경기상고 진학반에 있었던 그는 일찍이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터라 서울대 미대에 진학하고자 시험을 치뤘지만 실패로 끝났다. 대신 교사의 추천으로 한국산업은행으로 입사했다. 그의 첫 직장이 산업은행이라는 점은 지금 그의 발언과 활동을 볼 때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그가 입사했던 1962년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막 시작되던 때였고, 이상철은 ‘행원’이라는 직함으로 산업은행의 홍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홍보 관련 업무 중 하나가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한국 산업의 가능성을 알리는 책자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한국 산업현장을 직접 누비면서 여러 공장지대를 사진으로 포착했다. “당시 산업은행에서 <한국의 산업>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내는게 제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참고할 자료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 해서 관련 자료를 받아냈고 결국 그런 자료들이 화보집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죠.” 이상철이 말한다. 디자인 독학도로 이미 60년대 초반부터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현장에서 ‘디자이너’로서 활동했으니, 대학을 다닌 국내 1세대 디자이너들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현장 디자이너로서 자리를 굳혔던 것이다. 한국 산업화와 맞물려 있는 디자인 현장의 최전선에 있었던 셈이다. 

 

1970년 4월부터 발행해 왔던 한국브리태니커 사보 <배움나무>.

*자료제공: 이가스퀘어

 

모던 디자인

 

디자이너로서의 갈증은 강했지만 그 갈증은 오로지 홀로 채워야만 했다. 그나마 이를 채울 수 있었던 곳이 명동 중국 대사관이 있는 뒷골목에 자리했던 책방 거리였다. 그 중 하나였던 문예서림. “그림만 그릴 줄 알았지 글꼴, 편집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어요. 그때 그 책방을 알게 되었고 <룩(Look)>, <라이프(Life)>, <플레이보이(Playboy)>,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등을 보게 되었죠. 정식 수입은 안 되었고, 미 8군에 공급되었던 것들 중 폐기처분된 것들이었어요. 표지가 붙어 있었던 게 없었죠.” 이상철에 의하면, 그곳은 한마디로 “기가막힌 세계”였다. 그 세계에 그는 탐닉했고, 그곳은 이상철 디자인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신세계’가 열렸으니 현재는 계선산업으로 알려진 엘리건스 인테리어의 장충섭 씨와의 만남이었다.

 

제대 후 여전히 산업은행의 일꾼이었던 그는 여의도 개발계획에 참여하여 책자 제작을 맡았고, 덕분에 여러 건축가와 친분을 갖게 되었다. 장충섭 씨와의 인연으로 그는  1969년도부터 파트타임으로 엘리건스 인테리어에 출퇴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상철은 그동안 보아왔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 세상을 접하게 된다. “찰스 임즈, 마르셀 브로이어부터 시작해서 <도무스(Domus)> 등의 디자인 잡지까지. 모더니즘 디자인이 그곳에 결집해 있었어요. 완전히 새로운 사무실 환경이었고, 저는 그 세상에 푹 빠졌던 거죠.” 그는 덧붙인다. “이미 그때부터 공간, 인테리어 등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어요. 그곳에 가서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잡지에 탐닉하고, 서양의 여러 모던 디자이너들을 알게 된 거죠.” 

 

디자인 밑바탕이라고 할 것도 없었던 폐허와도 같은 한국의 60년대에, 젊은 20대의 이상철에게 서양 모던 디자인은 디자이너로서 한 발자욱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소중한 디딤돌이었다. 국가는 산업화를 위해 전례없는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고, 산업화를 촉진시키는 도구로서 디자인은 여러 기업들의 당면 과제이자 돌파구였다. 그리고 젊은 이상철은 거친 산업화의 한 복판에서 오늘날 그의 디자인관을 만들게 된 서구 디자인 개념과 모델을 접하고 있었다.

 

디자인 회사 이가솜씨. 왼쪽부터 디자이너 원주연, 카피라이터 김인숙, 디자이너 임성재, 디자이너 김진권,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이상철.

*자료제공: 월간 <디자인>

 

디자인과 윤리

 

1970년대는 이상철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1971년 첫 직장인 산업은행을 그만두고 한창기 씨를 통해 한국 브리태니커 지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그 당시 여전히 생소했던 ‘아트디렉터’로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브리태니커 판촉물들과 잡지 <배움나무>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대표적인 디자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잡지 <뿌리깊은나무>의 창간 작업에 착수했다. 1976년 3월 창간된 <뿌리깊은나무>는 본래 1973년 봄 창간 예정이었다. 하지만 잡지 창간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이상철은 브리태니커를 떠나 독립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가 자문으로 속해 있는 디자인 이가스퀘어어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이가솜씨 어소시에이츠를 만들게 된다.

 

1977년 9월호 월간 <디자인>에 <뿌리깊은나무> 편집인이었던 윤구병 씨는 당시 이가솜씨의 활약상을 이렇게 소개한다. “기억에 남는 대로 몇 개만 열거해도 이가솜씨는 우리나라 산업을 해외에 소개하는 한국산업은행 소개 책자를 만들었고, 일본에 있는 로얄 모노카 호텔, 서울 미라마 호텔, 코리아나 호텔 및 도큐 호텔의 코퍼레이트 아이덴티피게이션 프로그램 및 싸인 계획에 참여했고, 삼호주택의 아파트먼트 도색과 싸인 계획을 비롯하여 광고와 판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획과 작업을 맡아서 해냈으며, <뿌리깊은나무>의 아트디렉션을 하고 있고 문화공보부의 포토 다이어리와 코리아 포토 뉴스지의 아트디렉션을 해 왔다. 그밖에 주식회사 진로의 해외 소개 책자를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업들의 해외 소개 책자를 만들었으며, 코오롱 고속뻐스 도색 작업도 맡았다.”

 

코오롱고속버스 도색 디자인.

*자료제공: 월간 <디자인>

 

삼호아파트 도색 디자인.

*자료제공: 월간 <디자인>

 

심볼마크 및 CI 디자인.

*자료제공: 월간 <디자인>

 

1970년대는 한국에 디자인 개념이 정착되는 시기였으며, 디자인은 기업과 일체를 이루며 뜨거운 성장 열기에 반응하고 또 부응했다. 이가솜씨는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작은 디자인 전문 회사로서 아트디렉션, 광고, 편집,  CI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에 관여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캠브리지와 한샘의 광고 아트디렉팅이 있다. 한국의 경제 성장만큼이나 숨가쁜 일상의 연속이었고, 뒤돌아볼 새 없는 오로지 앞을 위한 전진 뿐이었다.

 

그리고1980년대, 그에게 어떤 회의감이 찾아왔다. “정말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우리 사회가 고도성장하면서 모순이 많죠. 지금도 그렇고요. 그런 비판적인 생각이 생기게 되면서 1980년대부터는 광고 일을 하지 않게 되었어요. 내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최소한 이 사회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으면 하지 말아야겠다는 자각이 생긴 거죠.” 

 




1980년대 초반 의류회사 캠브리지를 위한 광고디자인.

*자료제공: 이가스퀘어 

 

1980년 4월 월간 <디자인> 혁신호 리뉴얼 작업.

- 표지사진: 에드워드 킴 / 제호디자인: 김진평

* 자료제공: 월간 <디자인> 

 

삶을 위한 디자인 그리고 ‘디터 람스’와 ‘엔조 마리’

 

2014년 4월. 이 글을 위해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엔조 마리로 한창 들떠 있었다. 논란 많았던 DDP가 개관한 이 시점에 그가 기획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엔조 마리 전시가 개관전으로  열렸고 6월까지 계속된다. 그는 전시를 성사시키기 위해 직접 엔조 마리를 이태리까지 찾아갔다. 자신이 처한 디자인 현장에 대한 어떤 절박함이 자신을 그렇게 움직였다고 한다.

 

“50년 동안 상업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왔죠. 그러면서 디자인 현장이 심각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경제력이 좋아지면 더 나아질거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60년대 제가 디자인 비지니스를 시작했을 때보다 더 나빠졌어요. 기업의 힘은 커지고 있고, 막상 디자이너의 존재감이 나아지진 않았어요. 기업들은 디자인으로 돈을 더 벌겠다는 생각만 가득하죠. 이런 모순이 가득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내 힘으로라도 사람들에게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고 봤고, 그게 바로 디터 람스와 엔조 마리와 같은 전시 기획이었습니다. 기업들은 이윤을 추구하더라도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2010년 12월부터 2011년 3월까지 서울 대림미술관에서 진행되었던 독일 디자이너 디터 람스 전시. 아래는 그의 유명한 디자인 십계명이다.

*자료제공: 이가스퀘어

 

디터 람스 전시장 내부 모습.

- 사진: 김용관

*자료제공: 이가스퀘어

 

디터 람스의 전시 자체는 일본 큐레이터의 기획물이었다. 마침 일본을 시작으로 하는 디터 람스 세계 순회전이 기획되고 있었는데, 이상철이 디터 람스 전시 의향을 전달하면서 한국 전시 또한 성사된 것이다. 디터 람스와 엔조 마리. 서로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공통된 디자인 철학이 있다. 디자인은 생활 속으로 흡수되어야 하고, 오랜 기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오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여기서 오늘의 디자인을 공예의 개념으로 복원시키고자 하는 이상철의 태도와 함께,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디자인이 이 나라에 정착되어야 한다는 디자인에 대한 보편적 신념이 엿보인다.

 

엔조 마리 전시의 영문 전시명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Design Allegory of Enzo Mari towards Utopia’. 즉 ‘유토피아를 향한 엔조 마리의 디자인 알레고리’이다. 이상철은 설명한다. “엔조 마리는 유토피아로 가기 위해 디자인을 활용합니다. 사실 유토피아란 불가능하죠. 하지만 이를 향한 디자인은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는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고 봤어요. 특수층만 이용하는 디자인은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의 디자인에는 전쟁 후 유럽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가득합니다. 그는 디자이너라기 보다는 철학자이자 예술가입니다. 그리고 그는 장인과 공예의 중요성을 직시했어요. 우리 일상에서 쓰이는 도구들이 모두 디자인이자 공예인 것이죠.”

 

1970년대 한국의 디자인은 기업 봉사형 디자인이란 키워드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상철이 걸어온 길은 그런 기업 봉사형 디자인의 전형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기업을 상대로 일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자본주의와 대량생산 시스템 안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삶과 공예가 지닌 가치의 상실을 지적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디자인을 제시해온 엔조 마리를 한국에 소개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기획과 소개가 아닌, 디자이너 이상철이 걸어온 한국 디자인 현장에 대한 무언의 비판이자 묵직한 침묵을 통한 디자인 발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이 사회가 디자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금 던지길 희망하고 있다. 디자인이 우리 삶에 무엇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부재한 이 사회 속에서 그가 기획한 두 건의 디자인 전시는 정치적 도구 혹은 가시적 성과로서 변질된 디자인 행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전시의 핵심은 엔조 마리의 ‘작품 전시’가 아닌 ‘생각의 실천’이었다. 디자인 자급자족 프로젝트인 1973년 작업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Autoprogettazione)’의 동대문 시장 버전 탄생이 그것이다. 이상철은 과학기술대의 김상규 교수에게 엔조 마리의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그 결과 동대문 상인을 위한 ‘오픈 소스 디자인’이 실행되었다. 누구나 매뉴얼만 있으면 직접 자신이 필요한 도구를 만들고 개인의 쓰임에 맞게 발전시킬 수 있는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는 보편적 디자인을 추구하는 엔조 마리 디자인 철학의 정수이다. 그 철학은 이 나라에 맞게 특수하게 구현됨으로써 또 하나의 보편적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나는 많은 사람의 영향을 받았고, 또 지금 이 나이까지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아직 이 사회가 가능성은 있구나 싶어요. 그래서 이 사회의 괜찮은 가치가 아직도 있다면, 보고 발견해서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요. 남은 시간을.” 디자이너, 아트디렉터, 플래너, 토탈 마케터 등으로 그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그리고 지금 엔조 마리 도록에 이상철은 프로젝트 프로듀서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 그가 앞으로 하고픈 일은 삶을 위한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이미 그는 디터 람스와 엔조 마리 뿐만 아니라 여러 전시 기획을 통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전시를 통한 디자인 개념에 대한 재고 촉구. 조금은 색이 다른 또 하나의 ‘디자인 운동’으로도 보이는 이유는, 그 안에 디자이너 이상철의 견고한 디자인 철학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71세의 나이에도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그의 삶의 스펙트럼. 그 스펙트럼의 가장자리는 여전히 날렵하게 빛나고 있다.

 

현재 DDP에서 열리고 있는 엔조 마리 전시. 6월까지 계속된다.

- 사진: 양성윤

*자료제공: 서울디자인재단

 

 

엔조 마리의 디자인 사상이 잘 드러난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

- 사진: 양성윤

*자료제공: 서울디자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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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가경

디자인 저술가. 이화여대에서 독문학을, 홍익대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다. 사월의눈이라는 사진책 출판사 운영과 별도로 디자인 현장에서는 그래픽 디자인 관련 글을 쓰고 강의한다. 지은 책으로 <세계의 아트디렉터 10>(2009)이 있으며, 현재 두번째 책인 <세계의 북디자이너 10>을 쓰고 있다. 

Tag
#디자인 칼럼 #이상철 #전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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