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8일 오후 4시 27분, 구마모토현 구마모토 지방을 진원으로 하는 규모 7.1의 지진이 발생해, 우키시와 히카와정에서 최대진도 7을 관측했다. 이 지역은 2016년 구마모토 지진의 활동역과 겹치는 히나구 단층대의 움직임으로 보이며, 공교롭게도 그 대지진으로부터 꼭 10년이 되는 해에 다시 땅이 크게 흔들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진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날에 '방재용품'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쩐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흔들림이 지나간, 혹은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 되짚게 되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오래 품어온 오해 하나 - 재난 대비는 ‘창고의 문제’라는 것. 비상식량과 손전등, 생수를 상자에 담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밀어 넣고, 그것을 꺼낼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일.
지진이 잦은 일본은 지난 15년간(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방재를 창고에서 삶 속으로 옮겨왔다. 현관으로, 책상 위로, 가방 속으로, 그리고 마침내 재난 이후의 집 그 자체로. 방재는 단순 비상용품이 아니라, 일상의 설계에 녹아들어왔다.
1. 페이즈 프리(Phase Free) — 평상시와 비상시의 경계를 지운다
일본 방재 디자인의 철학적 뼈대는 '페이즈 프리'라는 개념이다. 2014년경 페이즈프리협회의 사토 다다유키 대표이사가 제안한 이 개념은, 관 주도로 특수한 비상물자를 비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기존 방식의 한계를 인식하며, 방재를 일상과 매끄럽게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핵심은 단순하다. 재난이 닥친 '그날'을 위해 따로 사두는 대신, 매일 쓰는 물건이 그날에도 제 역할을 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이 사고방식은 2025년에 이르러 '완전한 생활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좋은 페이즈 프리 제품의 목표는 '방재용품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스툴백(의자형 방재 가방)이다. 평소에는 가방을 스툴(의자)로 쓸 수 있어,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디자인 덕에 거실이나 현관에 두어도 위화감이 없고, 유사시엔 곧바로 들고 나갈 수 있다. 급수 백이나 LED 라이트 등 방재용품 10점이 세트로 담겨 있다. 방재 가방을 '숨겨야 할 짐'에서 '거실 가구'로 승격시킨 발상이다. 평소에 앉는 의자가, 흔들리는 순간 곧장 생존 도구가 된다.


배려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물건도 있다. ‘토모리에이드(TOMORI AID)’는 손전등을 랜턴처럼 쓰게 해주는데, 그 출발점이 '배려'이다. 정전 시 손전등은 유용하지만 빛이 직접적이라 밤의 대피소에서 주변 사람에게 눈부심을 주기 쉽고, 비추는 곳이 한정되어 방 전체에 빛이 닿지 않는다. 홀로 쓰는 도구가 아니라 여럿이 부대껴야하는 대피소의 밤을 헤아린 설계다.


또 하나, '앗토!(あっと!)’라는 라이트겸 주두주걱이 있다. 일본어로 무언가 문득 떠올랐을 때 내는 감탄사 '앗!'에서 따온 이름이다. 평상시엔 구둣주걱이나 현관을 밝히는 라이트로, 비상시엔 손전등으로 쓰는 제품인데, '!' 마크를 모티프로 한 형태다. 현관을 드나들 때마다 평소 잊기 쉬운 재난 의식을 '앗!' 하고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물건의 형태 자체가 매일의 리마인더가 되는 것 — 페이즈 프리 사고의 정수다. 이런 흐름은 숫자로도 증명되고 있다. 일상과 비상을 구분하지 않는 이 새로운 방재의 관련 매출이 약 3.4배로 성장했다는 보도가 2025년 나왔다.

2. 반 시게루의 'DLT 목조 가설주택' — '임시'라는 단어를 다시 쓰다
물건에서 시작한 방재 디자인은 마침내 '재난 이후의 삶' 그 자체를 설계하기에 이르렀다. 2025년도 굿디자인상 대상(내각총리대신상)은 반 시게루 건축설계가 노토반도 지진 이재민을 위해 설계한 'DLT 목조 가설주택'에 돌아갔다.
이 작업의 아름다움은 '가설(임시)'이라는 단어의 통념을 깨뜨린 데 있다. 철거하지 않고 항구적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가설주택 모델을 실현했다는 점이 대상의 이유였다. 재난이 지나면 뜯겨 나가 폐기물이 되던 기존 가설주택과 달리, 그대로 영구 주택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재난용 가설주택은 늘’임시’와 함께 해왔다. 하지만 여기서 반 시게루는 가설주택의 임시성을 걷어내고 재난 이후의 사용에 대해서도 설계에 포함시켰다. 올해 총 5,225건의 심사 대상 중 1,619건이 수상한 굿디자인상에서, 그 정점에 재난 복구 건축이 놓였다는 사실은 꽤 상징적이다. 방재 디자인이 더는 부차적 장르가 아니라, 그해 디자인의 중심 의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3. 보이지 않는 것을 설계하다 — 방재 DX
가장 최근의 진전은, 방재 디자인이 손에 잡히는 물건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2025년 굿디자인상에서는 히로시마현 등이 구축한 광역 방재정보 시스템이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이 시스템은 여러 현이 공동 운용할 수 있는 방재정보 체계를 구축해 지자체 간 협력을 원활히 했고, 방재 직원의 정보 수집과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했으며, 방재에 밝지 않은 일반 사용자를 의식해 공개 사이트의 동선을 설계함으로써 주민의 대피 행동으로 이어지는 정보 발신을 가능케 했다. 심사위원은 이를 일본 최초의 공동 운용형 시스템이자 '방재 DX'의 새로운 형태로, 앞으로의 표준이 될 가능성을 지녔다고도 평가했다.
구마모토의 이번 지진처럼, 진도 7의 흔들림 뒤 결정적인 것은 정보의 속도다. 누가, 어떤 정보를, 얼마나 빨리, 얼마나 이해하기 쉽게 받는가 — 이 흐름 전체를 설계하는 것 역시 디자인의 몫임을 보여준 사례다.

4. 재난을 '경험'으로 — 훈련의 디자인
준비와 정보만큼 중요한 것이 '몸의 기억'이다. 2025년 굿디자인상을 받은 감재솔루션즈의 'Rescue Training Module™'은 이 지점을 겨냥한다. 실제 재해 현장을 재현한 구조 훈련 모듈로 디자인 관점의 평가를 받았다. 재난 대응력은 물건을 사두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반복해 몸에 새기는 훈련, 그리고 그 훈련을 다시 하고 싶게 만드는 설계까지가 방재 디자인의 범위로 들어왔다. '물건 → 정보 → 경험'으로 넓어지는 최근 흐름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5. 산업이 된 방재 — 현관 앞 스툴에서 국가 예산까지
이 모든 개별 작업 뒤에는 국가 예산과 산업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있다. 일본은 방재 관련 연간 예산이 130억 달러를 넘고, 2026 회계연도 완전 가동을 목표로 방재청(防災庁)이라는 중앙 지휘 기관을 신설하고 있다. 여기에 5년 주기의 비상식량 교체 수요가 겹치며, 2026년도 방재식품 시장은 319억 엔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즉 일본의 방재는 현관 앞 작은 스툴백부터, 재해지의 영구 가설주택, 국가 단위 방재 DX, 수십억 달러 예산까지 하나의 연속된 스펙트럼으로 설계되어 있다. 방재는 개인의 일이자 국가의 일이며, 그 둘은 같은 곳을 향한다.
구마모토의 여진이 잦아들지 않은 지금, 일본의 방재 디자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오히려 또렷하다. 재난 대비의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며, 무관심을 이기는 것은 규제나 공포가 아니라 '곁에 두고 싶은 디자인'이라는 것. 창고 깊숙이 넣어둔 비상 상자는 열어볼 일이 없지만, 거실에 놓인 스툴백과 현관의 '앗토!'는 매일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매일 눈에 들어오는 것만이, 정작 그날 손에 잡힌다.
반 시게루의 가설주택은 여기에 물음 하나를 더한다. 재난 이후의 삶을 '임시'로 다룰 것인가, 처음부터 오래 머물 집으로 지을 것인가. 2016년의 상처 위에 다시 흔들린 구마모토를 보며,이 물음은 부쩍 가까워진다. 흔들린 것은, 구마모토만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참고사이트
https://tomori-aid.com/
https://ethicame.com/shop/information/phasefree
Bijutsutecho
https://digitalpr.jp/r/120172
BosaijohoBosaijoho
https://gensai-solutions.com/news_cat/404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 학사 졸업
-영국 왕립예술대학원 제품디자인 석사 졸업
-생테티엔(프랑스)비엔날레 참여작가
-스왈로브스키 본사(오스트리아)협업작가
-런던디자인뮤지엄레시던시 작가
(현) 프리랜서 디자이너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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