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단지에 머무는 시간을 디자인하다
완주 청년디자인리빙랩, ‘완주 오감재’ 현장에서
10월 3일, 완주 삼례의 예술인마을 아트체험관을 찾아가는 길부터 문제가 생겼다. 주소를 입력해도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찾지 못했다. 일부러 찾아가기도 어려운 곳에 과연 사람들이 찾아올까?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주변 시설에 들렀다가 우연히 찾아온 사람들까지 체험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은 한국디자인진흥원과 바이널엑스가 운영하는 완주 문화선도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의 ‘완주 오감재’다. 향후 산업단지에 조성할 복합공간 서비스 ‘인더스테이’의 라운지를 미리 구현해 이용자의 반응을 살피는 자리였다. 실내에 들어서자 벽면에는 완주 아원고택의 숲길을 담은 영상이 펼쳐진다. 누군가는 빈백에 기대어 쉬고, 누군가는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테이블에서는 사람들이 엽서에 글을 쓰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여유를 누리는 풍경이다.
오감으로 경험하는 완주
‘완주 오감재(五感齋)’는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을 활용해 휴식과 재충전을 경험하도록 구성한 체험 공간이다. 완주의 풍경을 영상으로 감상하는 ‘보는 자리’, 책을 읽거나 엽서에 글을 쓰는 ‘읽고 쓰는 자리’, 지역 도예가의 작품을 체험하는 ‘만지는 자리’, LP 음악을 감상하는 ‘듣는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여기에 완주에서 개발한 향을 맡아보는 ‘완주의 향’, 지역의 간식과 차를 맛보는 ‘완주의 맛’이 더해졌다. 운영자는 완주의 생강, 딸기, 곶감 등을 활용한 상품을 소개하며 향을 맡거나 도예 작품을 직접 만져보도록 권했다. 지역의 생산물과 창작물을 하나의 휴식 프로그램으로 엮은 것이다. 그런데 향을 체험하던 한 방문객이 질문했다.
“그런데 실제 이 장소랑 이 향이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완주에서 만든 상품을 소개하는 것과 그 향을 통해 완주를 느끼게 하는 것은 다르다. 방문객의 질문은 지역자원을 활용하는 것과 지역을 체험하게 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생각하게 했다. 향과 맛을 완주의 풍경이나 생산자의 이야기와 연결한다면 방문객에게 그 지역을 기억할 만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장의 엽서가 만들어낸 대화
실내에서 눈길을 끈 곳은 글쓰기 테이블이었다. 여러 사람이 커다란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아 붓펜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전시된 캘리그래피 작품을 따라 쓰거나 마음에 드는 도장을 골라 한지 엽서를 꾸몄다. 처음에는 저마다 글쓰기에 몰두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서로의 글씨를 구경하고 칭찬하며 대화가 시작됐다. 누군가 마음에 드는 도장을 발견하면 동행인에게 보여주었고, 멋진 글씨를 발견하면 감탄하거나 직접 써보도록 권했다. 중년 여성 방문객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이 들렸다.
“이런 체험 너무 좋아요. 정서적으로 이런 것이 필요했어요.”
좋아하는 문구를 고르고 손글씨에 멋을 부릴 기회는 일상에서 그리 많지 않다. 친구들과 서로의 솜씨를 구경하며 웃고 즐기는 시간은 혼자 엽서를 꾸미는 일과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얼마 전 창원 청년디자인리빙랩에서는 운동을 계기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 대화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완주에서는 붓펜과 엽서가 교류의 매개가 되고 있었다.
문화공간을 기획하다 보면 새롭고 특별한 프로그램을 찾는 데 몰두하기 쉽다. 그러나 이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 것은 한 장의 엽서와 붓펜, 여럿이 둘러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었다.
평범한 활동도 함께하는 방식에 따라 특별해진다. 무엇을 제공하느냐 못지않게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즐기도록 할 것인지가 궁금해지는 장면이었다.
자연과 공간의 경계를 디자인하다
야외에서는 완주의 지역 크리에이터가 진행하는 요가·명상·싱잉볼 프로그램 ‘일상의 이완’도 열렸다. 나무와 잔디로 둘러싸인 마당에 참가자들이 요가매트를 펼치고 원형으로 앉았다. 진행자 앞에는 크기가 다른 싱잉볼과 명상 도구가 놓였다. 참가자들은 안내에 따라 자세를 바꾸며 움직임과 호흡에 집중했다. 잔디밭에서 몸을 움직이는 동안 풍경과 바람, 탁 트인 하늘이 활동의 일부가 된다. 이런 장점을 유지하면서 날씨에 따른 제약은 줄일 수 없을까?
오션뷰 호텔의 인피니티풀이 떠올랐다. 수영장 수면의 끝이 바다와 맞닿은 것처럼 디자인해, 이용자가 관리되는 시설 안에서도 드넓은 바다와 이어진 듯한 느낌을 누리게 한다. 자연과의 시각적 연결을 극대화하면서 시설이 제공하는 안전성과 편의를 확보한 것이다. 이 원리를 랜드마크의 야외 활동 공간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깊은 처마와 가변형 차양으로 비와 강한 햇빛을 피하고, 시야를 가리지 않는 방풍벽 등으로 외부환경의 영향을 줄이는 방식이다. 자연의 개방감을 유지하면서 실내의 쾌적함을 누릴 수 있는 반외부 공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자연과의 연결은 극대화하고, 환경적 제약은 최소화한다'. 향후 랜드마크의 디자인원칙을 수립할 때 고려할 만한 방향이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 예상보다 적었던 청년
이날 두드러진 것은 중장년층의 활발한 참여였다. 친구들과 함께 엽서를 꾸미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고, 길 건너 성당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들른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운영 관계자로서는 청년 참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연휴와 주말이라는 특수한 일정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문화선도산단 사업의 주 대상은 산업단지 청년 노동자다. 이들의 숙박·휴식·문화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사업에서 예상하지 못한 연령층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는 라운지가 청년 노동자 외에도 폭넓은 이용자를 끌어들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향후 랜드마크를 지역사회에 개방한다면 주민과 외부 방문객의 수요도 살펴볼 만하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 서비스를 가장 필요로 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청년 노동자들은 왜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을까?
프로그램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홍보가 부족했거나 연휴라는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근무 일정이나 이동 여건이 걸림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현장에서는 예상 밖의 방문객들이 보여준 호응을 확인했다. 그러나 정작 이 사업의 주 대상인 청년 노동자들이 어떤 조건에서 이곳을 찾을지는 충분히 확인하지 못했다.
현장에 나와야 알게 되는 문제들
직접 찾아가 이용 과정을 살펴보니 개선해야 할 접점들이 드러났다.
첫 번째는 길 찾기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찾지 못했던 일은 방문 의향이 실제 방문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장애물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상시 운영할 시설이라면 위치정보 등록부터 주변 시설과 연계한 안내체계까지 갖춰야 한다.
두 번째는 체험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운영자는 지역 도예가의 작품을 소개하며 직접 만져보도록 권했다. 그러나 설명에 따르면 실제로 손을 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전시품으로 여겨 함부로 만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져도 된다고 설명하는 것과 설명 없이도 손을 뻗게 만드는 것은 다르다. 작품의 배치와 안내방식을 바꾸면 운영자의 권유 없이도 참여가 자연스러워질지 시험해볼 수 있다.
세 번째는 조사 방식이다. 사전 신청 설문과 현장 설문의 차이를 설명하는 상황이 있었고, 질문이 자세해 작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현장 모의운영에서는 이용자의 의견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쉬러 온 사람에게 설문이 또 다른 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용자의 행동과 선택을 관찰하고 그 이유를 짧은 질문으로 확인하는 등 조사 부담을 덜 방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휴식의 질을 확인하려는 조사가 휴식을 방해한다면 조사 방법부터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
길을 찾고, 체험에 참여하고, 의견을 남기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들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이용자가 서비스를 누리기 위해 추가로 감수해야 하는 노력이다. 이런 부담을 줄이는 것 역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만큼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
건물을 짓기 전에 무엇을 시험해야 할까?
청년디자인리빙랩은 2025년 구미·완주·창원에서 출발했다. 세 산업단지의 지역대표단과 참여단은 워크숍, 인터뷰, 설문 등을 통해 총 38개의 과제를 발굴했다. 2026년에는 지역별 핵심과제를 구체적인 서비스로 발전시켜 현장에서 검증하고 있다. 완주에서는 청년과 노동자, 주민들이 숙박·식사·휴식 공간의 부족이 주요 문제로 제기되었다. 산업단지 출장자는 마땅한 숙박시설을 찾기 어려웠고, 노동자와 지역 주민에게는 일상적으로 이용할 만한 휴식·문화시설이 필요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된 서비스가 숙박공간과 라운지를 결합한 ‘인더스테이’다.
이번 ‘완주 오감재’는 그중 라운지를 소규모로 구현한 현장 모의운영이다. 방문객이 어떤 활동을 선택하고 어디에 머무는지 관찰하는 한편, 객실 유형과 편의요소, 문화프로그램에 대한 수요도 조사한다. 이렇게 확보한 자료는 향후 완주 문화선도산단에 들어설 랜드마크의 공간과 서비스 계획에 반영할 예정이다. 현장에서는 준비된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방문객도 만날 수 있었다. 한 방문객은 천장을 유리로 만들어 실내에 누운 채 달과 별을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구체적인 체험을 하고 나면 한 단계 더 나은 상태를 상상하게 된다. 이것이 현장에서 실험 공간이 다양하게 시도되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용자 욕구를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실제 산업단지가 아닌 문화시설에서 주말 방문객을 대상으로 라운지의 이용 방식을 시험했다. 앞으로는 본래 목표 이용자의 평일 생활환경에서도 이러한 서비스가 작동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또 다른 질문이 남았다.
우리는 산업단지에 휴식공간이 부족하다는 문제에서 출발했다. 원하는 시설을 갖추기만 하면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충분히 쉴 수 있을까?
영국 NHS의 직원 휴식센터 연구에서 참고할 만한 대목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두 병원의 휴식센터에 17주 동안 약 1만 5천 건의 방문이 기록됐다. 연구진은 이처럼 상당한 이용 실적이 있었음에도 시설을 이용하지 않은 직원들의 사정까지 조사했다. 그 결과 휴식시간과 거리의 제약뿐 아니라 혼자 쉬고 싶거나 시설을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등 서로 다른 이유가 확인됐다. 이러한 접근은 완주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번에는 찾아온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봤다면, 다음에는 행사장 밖에서 청년 노동자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평소 언제 어디에서 쉬는지, 어떤 문화활동을 원하는지 살펴보고, 이들의 근무시간과 생활 동선에 맞춘 조건에서도 서비스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산업단지에 부족한 것은 휴식공간만이 아니라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이번 시범운영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삼례로 향할 때 나는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를 찾지 못했다. 위치정보를 바로잡으면 개선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인더스테이가 조성된 뒤에도 청년 노동자들이 실제로 찾아올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공간을 찾아가는 길은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그곳을 찾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일상에서 찾아야 한다.
정리: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
참고자료
Blake, H. 외(2020), COVID-Well: Evaluation of the Implementation of Supported Wellbeing Centres for Hospital Employees during the COVID-19 Pandemic, International Journal of Environmental Research and Public Health, 17(24), 9401.
2025 완주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 결과모음집(2026). 한국디자인진흥원, 바이널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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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쉬어가는 힐링 라운지 「완주 오감재」
‘완주 오감재(五感齋)’는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 등 오감을 활용해 휴식과 재충전을 경험하는 체험형 공간이다.
완주의 풍경을 영상으로 감상하는 ‘보는 자리’, 책과 한지 엽서 등을 이용하는 ‘읽고 쓰는 자리’, 지역 도자기를 경험하는 ‘만지는 자리’, LP 음악을 감상하는 ‘듣는 자리’, 완주산 편백·생강·곶감 등의 향을 경험하는 ‘완주의 향’, 지역 간식과 차를 즐기는 ‘완주의 맛’ 등 6개 테마로 구성된다.
- 운영기간: 2026. 9. 29.(화) ~ 10. 9.(금)
- 운영시간: 09:00~18:00
- 휴무일: 매주 월요일
- 장소: 완주 예술인마을 아트체험관Ⅱ 다목적 공간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 82-24)
- 대상: 완주산단 근로자 및 산단 인근 주민
- 참여방법: 별도 신청 없이 운영시간 중 자유 이용
설문조사에 참여한 방문객에게는 삼례책마을 카페에서 무료 시음차도 제공한다.
완주의 지역 자원과 함께하는 로컬 프로그램
완주에서 활동하는 지역 크리에이터와 함께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각 프로그램은 사전 신청자를 대상으로 진행한다.
- 요가·명상·싱잉볼
10. 3.(토) / 완주 오감재 및 카페 마당
완주의 자연과 함께 몸과 마음을 쉬어가는 프로그램
- 도자기 만들기
10. 4.(일) / 삼례책마을 카페
완주의 지역 공예와 연계한 체험 프로그램
- 막걸리 빚기
10. 7.(수) / 삼례책마을 카페
완주의 지역 식문화를 경험하는 프로그램
참여 안내
‘완주 오감재’는 별도 신청 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요가·명상·싱잉볼, 도자기 만들기, 막걸리 빚기 등 로컬 프로그램은 사전 신청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체험 프로그램의 세부 일정과 신청방법은 완주 청년디자인리빙랩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완주산단에서 일하거나 생활하는 근로자와 지역 주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 신청하기 : https://mobileakro-cell.github.i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