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느라 내 일을 못 하는 사람들
산업단지정책해커톤 서비스디자이너, 이종휘 크레타입 대표 인터뷰
이종휘 크레타입 대표는 지난 8년간 42개의 공공서비스디자인 과제를 수행한 서비스디자이너다. 그중 18개 과제가 우수과제로 선정되었고, 대통령상 1회, 국무총리상 2회, 장관상 15회를 받았다. 이번 산업단지정책해커톤에서 이 대표가 참여한 산단 LAB소디 팀은 근로자의 근무 시간과 공공·금융·생활 서비스 운영 시간이 겹치는 문제를 ‘시간 격차(Time Gap)’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활·행정 대행 플랫폼 ‘맡겨줘, 부르미!’를 제안했다. 이 인터뷰는 산업단지 문제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로 다시 읽은 서비스디자이너의 기록이다.
인터뷰 — 이종휘가 말하는 “시간 격차”와 서비스디자인
이종휘 크레타입 대표
지난 8년 간 42개 공공서비스디자인 과제 진행(18회 우수과제 선정: 대통령상 1회, 국무총리상 2회, 장관상 15회)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디자인 등록 기업
前 서울디자인재단/ 인천테크노파크 서비스디자인 컨설턴트
前 고영테크놀러지, 인프라웨어 UX/UI 디자이너
국민대학교 인터랙션 디자인 석사, 연세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학사
기대와 걱정이 같이 들었습니다
“처음 이 해커톤에 참여한다고 들으셨을 때, 솔직히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대와 걱정이 같이 들었습니다. 기대한 이유는, 산업단지가 한국 산업의 핵심인데도 정작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 경험은 정책 언어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고 늘 느껴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8년간 42개의 공공서비스디자인 과제를 진행하면서, 정책은 책상 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해왔습니다. 그런 방식이 그동안 디자인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던 ‘산업단지’라는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건, 한국 공공서비스디자인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리라고 봤습니다.
걱정한 이유는, 해커톤이라는 형식이 자칫하면 빠르게 아이디어만 뽑아내고 끝나는 행사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 1박 2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산단 근로자, 거주시민, 산업부 사무관, 공공기관 직원이 한 테이블에 앉는다는 구성을 보고는 솔직히 무게가 묵직했습니다. 서비스디자인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해관계자가 너무 많을 때 누구의 목소리에 무게를 둘 것인가’인데, 이번 해커톤은 그 어려움이 압축적으로 펼쳐지는 자리였거든요.
그런데 김경진 대표님과 다른 퍼실리테이터 분들과 사전 모임을 거치면서, ‘이번에는 결과보다도 문제를 어떻게 보게 될지가 중요하겠다’는 마음으로 정리됐습니다. 보여주기식 아이디어가 아니라 정말 현장의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요.”
생산은 있지만 삶은 비어 있는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행사 전에는 산업단지를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행사 전의 제 머릿속 산업단지는 ‘생산은 있지만 삶은 비어 있는 공간’에 가까웠습니다.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장소이지만, 동시에 생활 인프라나 문화, 돌봄, 관계, 여가 같은 요소는 늘 후순위로 밀려난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쉽게 말해 ‘일하러 가는 곳’이지, ‘사람이 오래 머물며 살아가기 좋은 곳’으로는 잘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이미지도 솔직히 도식적이었어요. 회색 건물, 셔틀버스, 교대 근무, 한국 산업화의 상징. 정주여건 통계—초등학교까지 평균 9.3km, 영화관 24.8km, 백화점 44.3km—같은 수치를 봐도 ‘거리가 멀어서 불편하겠다’ 정도로만 평면적으로 읽었습니다.
서비스디자이너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산단을 ‘공간’과 ‘산업’으로만 봤지 ‘사람들이 매일 살아내는 시간’으로 보지 못했어요. 거기서 누군가의 점심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퇴근 후 저녁 7시에 어떤 일들이 가능하고 불가능한지, 주말의 동선이 어디서 끊기는지—이런 일상의 결을 한 번도 진지하게 들여다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회색 안에 얼마나 많은 욕구와 이야기, 가능성이 숨어 있었는지를 이번 해커톤을 통해 다시 보게 됐습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정책에서 사람의 삶으로 전환됐습니다
“1박 2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은 무엇이었습니까?”
“세 장면이 떠오릅니다.
첫 번째는 참가자들이 처음에는 다소 조심스럽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경험을 아주 구체적으로 꺼내놓기 시작한 순간입니다. 보통 정책 논의 자리에서는 의견이 먼저 나오는데, 이번에는 경험이 먼저 나왔어요. ‘퇴근하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연차를 쓰는 게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동료에게 미안한 일이다’, ‘물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 같다’는 말들이 나오면서, 회의실의 공기가 차가운 ‘정책’에서 뜨거운 ‘사람의 삶’으로 전환됐습니다. 저는 그때 ‘아, 지금 진짜 문제에 닿고 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두 번째는 둘째 날 새벽이었습니다. 저와 비주얼라이터 김나연 님이 발표 자료를 다듬느라 결국 밤을 새웠어요. 그런데 자리를 돌아보니 다른 팀 퍼실리테이터와 비주얼라이터들도, 그리고 팀원들도 자기 자리에서 자료를 다듬고 있더라고요. 구미에서, 창원에서, 완주에서 온 사람들이 어제 처음 만났는데, 새벽에 같이 깨어있다는 것. 짧은 행사였지만 다들 ‘좋은 아이디어 하나를 내자’가 아니라 ‘이 문제를 허투루 다루지 말자’는 태도로 움직였다고 느꼈습니다.
세 번째는 다른 팀들의 발표였습니다. 특히 ‘붕어빵’ 팀이 무대에서 직접 출퇴근 근로자와 버스 역할을 연기하면서 ‘30분 기다렸는데 버스가 그냥 지나쳤다’고 했을 때 객석에서 터졌던 웃음. 그 웃음에는 공감과 분노와 체념이 다 섞여 있었어요. 정책 발표장에서 그런 웃음이 터지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물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진짜 산업단지 현장의 문제다’라고 느끼신 순간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저희 팀이 처음에는 산업단지 근로자의 어려움을 ‘은행이 멀다’, ‘병원이 부족하다’ 정도로 볼 때까지만 해도, 아직 본질에 못 들어갔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자료를 다시 보다가, 한 분이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았어요. ‘물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엔 시적인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이게 진짜로 그분의 일상 감각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시설의 유무가 아니라 근무 시간과 생활 서비스 시간이 정확히 겹친다는 구조에 있었습니다. 근무시간 08:00~17:00, 은행 09:00~16:00, 병원 외래진료 09:00~17:00, 주민등록 방문민원은 근무시간 내 3시간만 가능. 이 시간표를 노려보던 침묵의 순간이 있었어요. 누군가는 ‘그래서 평생 반차를 써왔구나’라고 말했고요. 그때 저는 ‘이건 개인의 불편이 아니라 산단의 시간 구조 자체의 문제다’라고 확신했습니다.
특히 무거웠던 건 감정의 층이었습니다. 연차를 쓰거나 잠깐 자리를 비우는 일조차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소규모 인력 구조에서는 동료에게 부담을 넘기는 일이 된다는 점. 서비스디자인에서는 늘 표면의 현상 뒤에 있는 감정과 관계를 봐야 하는데, 산업단지의 문제도 똑같았어요. 여기서는 단순한 불편보다 ‘미안해서 못 나간다’, ‘내 일인데도 계속 미루게 된다’는 감정이 훨씬 중요했습니다. 그 감정이 수년간 누적되어 ‘나는 시민으로서의 권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감각으로 몸에 새겨진 상태였어요.
이게 산단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게 또 무거웠습니다. 교대 근무자, 새벽 노동자, 콜센터 종사자—한국 사회에는 ‘공식적인 시민의 시간표’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행정 시스템은 여전히 9시-6시 시민을 기준으로 짜있잖아요. 산단 근로자의 시간 격차 문제는 그 거대한 사각지대가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느꼈습니다.”
시설 중심에서 서비스 연결 중심으로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해커톤 하면서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활동 중에 바뀐 부분이 있었다면 무엇이고 왜 바뀌게 되었나요?”
“처음에 저도 산업단지 문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더 지어야 하나’, ‘무언가를 더 넣어야 하나’ 쪽으로 생각이 갔습니다. 산단 안에 은행 지점을 더 만들고, 병원과 복지 시설을 유치하고, 운영시간을 연장하자는 식의 시설 확충 논리. 또 저희 팀도 자연스럽게 디지털 통합 플랫폼 쪽으로 흘러갔어요. 모바일 앱으로 행정·금융 서비스를 통합하고, 챗봇이 안내하고, 자기서비스로 해결하자는 그림이요.
그런데 인터뷰 자료를 다시 보다가, 한 분이 ‘스마트폰으로 뭘 또 신청하라고요? 그게 또 일이에요’라고 했던 부분에서 멈췄습니다. 우리가 ‘편하게 해드린다’고 만든 것이 그분들에게는 ‘또 하나의 학습 부담’이 되는 거예요. 자기서비스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편의지만,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진입 장벽이거든요.
그래서 시설 중심에서, 그리고 디지털 자기서비스 중심에서—‘서비스 연결 중심’으로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저희가 다시 정의한 문제는 ‘산단에 생활 인프라가 부족하다’가 아니라 ‘산단 근로자는 자신의 시간을 통제할 수 없고, 그 시간의 틈 때문에 기본적인 삶의 업무조차 처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를 이렇게 바꾸어 보니 답도 자연스럽게 바뀌었어요. 무언가를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에게 새로운 능력을 요구하지 않고 기존의 어려움을 떠맡아주는 구조—근로자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대행형 플랫폼. ‘맡겨줘, 부르미!’라는 이름이 그 전환에서 나왔습니다.
또 하나 바뀐 건, ‘누구의 시간을 누구에게 옮길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시간을 살리려고 다른 사람의 시간을 착취하는 구조라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단순한 심부름 플랫폼이 아니라, 공공기관 인증을 거친 검증된 대행자, 표준화된 프로세스, 산단 인근의 신규 일자리로 연결되는 구조로 디자인했습니다.”
기존의 것을 다시 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공감하신 아이디어는 무엇이었고, 왜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퍼실리테이터 입장이라 저희 팀 아이디어를 꼽기는 조심스럽고, 다른 팀 중에 두 팀의 아이디어가 인상 깊었습니다.
하나는 최우수상을 받은 ‘붕어빵’ 팀의 온통(On-通)이음 정류장입니다. 저는 이 아이디어의 진짜 힘이 ‘없는 걸 새로 짓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봤어요. 정류장은 이미 거기 있고, 사람들의 대기 시간도 이미 거기 있습니다. 새로운 시설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는’ 접근이죠.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작은 접점이 의외로 일상의 체감 품질을 크게 바꾼다는 걸 저는 늘 강조해왔는데, 정류장은 출퇴근의 시작과 끝에서 가장 자주 마주하는 공공 접점이거든요. 그 접점을 바꾸는 일은 곧 산업단지에 대한 첫인상과 마지막 인상을 바꾸는 일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광고 수입으로 운영 재원을 마련하고 현존 기술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실행 가능성까지 챙겼고요. ‘정류장은 이미 거기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시간을 채우는 것이다’라는 그 한 줄이 정말 좋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산당해’ 팀의 공장 비워드림입니다. 다들 ‘뭔가를 더 채우자’고 할 때, 이 팀만 ‘비우자’고 했어요. 발표자가 직접 공장 지붕에 올라가 실리콘 작업을 하던 사진을 보여줬을 때, 저는 그게 산단의 진짜 풍경이라고 느꼈습니다. 외부인이 상상하는 산단이 아니라, 매일 그 공간을 쓰는 사람이 보는 산단. 그 시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비움’이라는 단순한 동사 하나가 큰 힘을 가졌다고 봅니다.
두 아이디어 다 ‘기존의 것을 다시 본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저는 이게 좋은 서비스디자인의 표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감은 결국 ‘좋은 말’보다 ‘현장에서 바로 써볼 수 있겠다’는 감각에서 오는 것 같아요.”
실행이 어렵다는 게 아이디어의 가치를 깎는 건 아닙니다
“반대로 ‘아이디어는 좋지만 실행은 어렵겠다’고 느끼신 아이디어가 있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이건 조심스럽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실행이 어렵다는 게 아이디어의 가치를 깎는 건 아니니까요. 먼저 떠오르는 건 산업단지 전체를 RPG 게임 맵처럼 재해석하는 ‘산단파크’ 같은 유형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산업단지를 회색의 생산 공간이 아니라 청년이 관계를 맺고 즐기고 도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만 실제 정책으로 옮기려면 다수 기업의 참여, 공간 운영 주체, 예산, 지속적인 콘텐츠 기획, 지역 수용성, 그리고 무엇보다 게임화의 동력을 유지하는 운영 인력까지—이걸 동시에 풀어야 합니다. 게임은 콘텐츠가 멈추는 순간 죽기 때문에 실행 난도가 상당히 높다고 봤습니다.
또 하나는 ‘산단지기’ 같은 복합 건물형 거점 아이디어였습니다. 콘셉트로는 정말 매력적이에요. 1층 클린존부터 7층 스테이, 옥상 루프탑까지 한 건물 안에 산단 근로자에게 필요한 모든 기능을 모아두는 그림. 그런데 공공 영역에서 일해본 입장에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런 거점형 시설은 산업부, 산단공, 지자체, 행안부, 복지부, 고용부 등 운영 주체와 예산 출처가 합의되는 데만 보통 3~5년이 걸립니다. 빈 건물을 활용한다고 해도 소유권, 리모델링 예산, 향후 운영 인건비, 안전관리 책임자—이 모든 게 얽혀요.
저는 아이디어의 가치와 실행의 난도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행이 어렵다고 해서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아이디어는 장기 비전으로 두고, ‘프로토타입의 크기를 줄여서’ 일부 기능부터—예를 들면 산단지기라면 ‘클린존’ 한 층부터—실험적으로 시작해서 성과가 검증되면 단계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이 현실적일 거라고 봅니다. 큰 예산을 한 번에 쓰는 것보다 작게 테스트해보고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왔거든요.”
가장 큰 차이는 의견에서 출발하지 않고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서비스디자인 방식이 일반 회의나 일반적인 워크숍과 다르게 느껴진 지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큰 차이는 ‘의견’에서 출발하지 않고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일반 회의는 보통 ‘문제 정의 → 원인 분석 → 대안 → 의사결정’ 순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효율적인 것 같지만, 사실 가장 먼저 발언권을 얻은 사람의 프레임이 회의 전체를 지배해요. 직급이 높거나 발언 경험이 많은 사람의 견해가 자연스럽게 답이 되고, 회의실에서 가장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의 목소리는 가장 늦게 나오거나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죠. 서비스디자인 워크숍은 누가 어떤 시간대에, 어떤 감정으로, 어떤 불편을 겪는지부터 파고듭니다. 페르소나든 여정맵이든, 결국 ‘이 사람의 오전 8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먼저 묻거든요. 이렇게 시작하면 직급, 부서, 전문성과 무관하게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섭니다. 누구도 ‘한 시민의 아침 시간’에 대한 공식 전문가가 아니니까요.
이번 해커톤에서 그 효과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저희 팀에 산업부 류진선 사무관님이 함께 계셨는데, 보통 정책 회의 자리였다면 사무관님 발언에 자동으로 무게가 실렸을 거예요. 그런데 페르소나 ‘나바빠’ 씨를 일반론적으로 그리는 자리에서는, 사무관님도 구미에서 온 팀원도 완주에서 온 팀원도 같은 위치에서 한 명의 시민의 시간을 따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평평한 출발선이 회의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꿉니다.
또 하나 결정적인 차이는, 서비스디자인은 문제를 다시 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일반 회의에서는 주어진 문제를 빨리 푸는 데 집중하지만, 서비스디자인에서는 ‘애초에 우리가 풀고 있는 문제가 맞나?’를 계속 묻습니다. 이번 해커톤에서도 그 차이가 분명했어요. 처음엔 시설 부족, 교통 부족처럼 보이던 문제가, 실제로는 시간 격차, 심리적 불안, 관계 단절, 자부심의 부재 같은 더 깊은 층위의 문제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재정의의 힘이 서비스디자인의 가장 큰 차별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건 심사위원장님이 총평에서 창의성의 두 조건으로 ‘절박감과 심리적 안정감’을 꼽으셨는데, 서비스디자인 워크숍은 바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구조라고 봅니다.”
정책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입니다
“산단 근로자의 경험과 마음에서 시작하고, 창의적으로 풀어가는 서비스디자인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저는 이 방식이 산업단지 정책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산업단지의 문제는 숫자로만 잘 안 잡히기 때문입니다. 출퇴근 동선에서 느끼는 불안, 연차를 쓰기 미안한 마음, 퇴근 후 아무것도 처리할 수 없는 무력감, 지역과 단절되어 있다는 감각 같은 것들은 통계표보다 먼저 사람의 표정과 말에서 드러맙니다. 서비스디자인은 그 지점을 놓치지 않게 해줍니다. 정책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라고 저는 늘 말해왔는데, 이번 해커톤은 그 번역 작업이 짧은 시간 안에서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자리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는 서비스디자인이 ‘창의적’이라는 말로 묘사되는 것에 늘 약간의 거리를 둡니다. 창의성은 결과이지 출발점이 아니거든요. 출발점은 오히려 ‘듣기’와 ‘관찰’이라는 굉장히 느리고 끈질긴 작업입니다. 창의성은 멋있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또 하나, ‘근로자의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근로자가 말한 그대로 만들어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용자는 자신의 불편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 불편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헨리 포드가 했다는 말처럼, ‘사람들에게 뭘 원하냐고 물으면 더 빠른 말이라고 답한다’는 함정이 있습니다. 서비스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사용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말 뒤에 숨어있는 진짜 욕구—이번 사례로 치면 ‘내 시간의 주권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를 발견해서 다른 형태의 해법으로 번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해커톤에서 저희가 찾은 해법들도 대부분 거창한 기술보다, 현실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연결 방식과 접점 디자인에서 나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근로자의 마음에서 시작하지 않았다면 ‘대행 서비스’라는 현실적인 아이디어는 결코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결국 사람의 경험과 관계망 속에서 출발해야 정책도 살아 움직입니다.”
산업단지를 생산 효율 중심의 공간으로만 보는 시선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 해커톤 이후 산업단지 정책이 달라져야 한다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산업단지를 여전히 ‘생산 효율 중심의 공간’으로만 보는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산업단지는 생산의 현장입니다. 산단공이 1964년부터 62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전국에 1,359개의 산단이 있죠. 하지만 이제는 그곳이 일터이면서 동시에 삶터라는 관점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청년이 오래 머물고, 숙련 인력이 떠나지 않고, 지역과 산업이 함께 지속되려면 산업단지 정책은 더 이상 공장과 도로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 이동, 안전, 관계, 돌봄, 문화 같은 일상의 문제를 함께 다뤄야 해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책이 공급자 중심의 시설 확충 논리에서 벗어나 근로자의 실제 여정과 시간 구조를 해결하는 서비스형 정책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산단 정책 언어는 ‘기업 입주율, 가동률, 매출, 고용 인원’ 같은 집계 단위였어요. 거기에 ‘한 사람의 하루’, ‘한 가구의 일주일’, ‘한 지역의 1년’이라는 단위가 들어와야 합니다.
제가 제안드리고 싶은 구체적 변화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모든 산단 관련 정책에 ‘근로자 시간 영향 평가’를 붙이는 것입니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 근로자 한 사람의 평균적인 하루에서 몇 분을 가져가는가, 혹은 몇 분을 돌려주는가. 이런 질문이 정책 의사결정의 기본 항목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환경영향평가가 있듯이 시간영향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청년디자인리빙랩’ 같은 상시 채널이 더 많은 산단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강윤주 원장님이 인사말에서 이걸 국내 대표 사례로 꼽으셨고, 완주에서 온 한 참가자가 ‘리빙랩 경험이 해커톤 참여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해커톤은 출발점일 뿐, 정책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평소에 산단 안에서 사용자와 정책 담당자가 만나는 자리가 계속 있어야 합니다. 이벤트가 아니라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사람들은 더 많은 설명보다, 실제로 삶이 조금 편해지고 안전해지고 연결되는 변화를 원합니다. 산업단지 정책도 이제 ‘무엇을 지을 것인가’보다 ‘어떻게 실제 삶 속에서 작동하게 할 것인가’를 먼저 묻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비스디자이너로서 오래 일하며 배운 게 있다면, 변화는 새로운 것을 짓는 데서 오기보다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를 바꾸는 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번 해커톤이 만든 가장 큰 변화도 결국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봅니다. 100명의 사람들이 이틀 동안 산단을 ‘시간의 관점’에서 다시 본 것. 그 시선이 정책 결정의 자리로 옮겨갈 때, 진짜 변화가 시작될 거라고 믿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처음 팀을 만나셨을 때 가장 어려워 보였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어려워 보였던 건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참여자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희 팀에는 구미에서 온 이유진, 이태근, 윤규진 님, 창원의 최세린 님, 완주의 최현진 님, 산업부 류진선 사무관님, 비주얼라이터 김나연 님이 한 자리에 모였어요. 같은 ‘산업단지’라는 단어를 써도 구미와 창원과 완주가 떠올리는 풍경이 다 달랐고, 같은 문제를 이야기해도 근로자는 생활의 불편을 말하고, 행정 쪽은 제도와 절차를 먼저 떠올리고, 디자이너는 구조를 보려 합니다. 이 차이가 잘 풀리지 않으면 이야기가 금방 ‘그건 원래 어려운 문제다’, ‘예산이 안 된다’, ‘시설이 부족하다’ 같은 익숙한 결론으로 흘러가요. 퍼실리테이터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빨리 하나로 묶기보다, 각자의 언어가 어떤 현실에서 나왔는지를 먼저 드러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첫 단계였습니다.
또 하나는 참여자들이 ‘제공하는 사람의 논리’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산단이라는 주제는 워낙 행정과 제도의 언어가 지배하는 영역이라, 문제를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가’, ‘어떤 시설을 지어야 하나’, ‘법적으로 가능한가’부터 묻게 돼요. 그런데 서비스디자인은 철저히 ‘이용하는 사람의 현실’에서 출발하는 방식이거든요. 그래서 초반에는 팀원들의 시선을 공급자의 자리에서 수요자의 자리로 옮겨오는 작업이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늘 무거웠어요. 1박 2일 안에 ‘낯선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기’ + ‘진짜 문제를 발견하기’ + ‘해법을 구체화하기’ + ‘발표 자료를 만들기’까지 다 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보통의 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라면 신뢰 형성에만 몇 주를 쓰는데, 여기서는 그 시간이 사실상 첫날 오후 몇 시간이었습니다. 퍼실리테이터로서 ‘얼마나 빨리, 얼마나 안전하게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것인가’가 처음의 가장 큰 숙제였어요.”
내 경험을 말해도 되는 자리라는 감각이 생겼을 때
“참여자들이 진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저는 참여자들이 진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계기가 ‘정답을 말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 경험을 말해도 되는 자리’라는 감각이 생겼을 때라고 봅니다.
이번 해커톤은 일반적인 발표형 워크숍이 아니라, 아이스브레이킹과 팀빌딩, 마시멜로 챌린지 같은 활동을 통해 먼저 서로를 낯선 사람이 아닌 같은 팀으로 느끼게 만든 점이 컸습니다. 그 과정이 없었으면 사람들은 끝까지 일반론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몸을 움직이고 웃고, 같이 작은 과제를 해결하는 시간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경험을 이야기할 심리적 안전감이 생겼다고 봅니다. 김경진 대표님이 사전 모임에서 의도적으로 이 시간을 두텁게 짜두신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명확한 전환점 하나를 짚자면, ‘페르소나에 자기 이야기가 섞여 들어가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페르소나 ‘나바빠’ 씨를 일반론적으로 그렸어요. ‘30대 중소기업 근로자, 평일 야근 잦음’—이런 식의 표면적 설정이었죠. 그런데 누군가가 ‘근데 이분, 점심시간에 은행 가려고 뛰어가본 적 있을 것 같지 않아요?’라고 하니까 다른 분이 ‘저는 두 번 갔다가 두 번 다 줄 서다가 못 보고 왔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페르소나가 ‘가상의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의 어떤 부분’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그때 다시 깨달았어요. 페르소나 작업의 진짜 힘은 ‘제3자를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있다는 걸. 자기 이야기를 직접 하라고 하면 부담스럽지만, ‘나바빠 씨라면 어땠을까요?’라고 우회해서 물으면 사람들이 훨씬 솔직해집니다. 페르소나가 일종의 감정의 안전망 역할을 한 거예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산단이 불편하다’ 같은 추상적인 말 대신, ‘연차를 쓰는 게 동료에게 미안하다’, ‘퇴근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 ‘내 일인데도 계속 미루게 된다’ 같은 자기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부터 팀이 살아났다고 봅니다. 서비스디자인은 원래 사람의 감정, 시간, 동선, 관계 속에서 문제를 읽어내는 방식인데, 그 진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이 바로 문제 정의가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하루 중 정확히 언제, 왜 포기하게 되는가
“어떤 질문이나 활동이 참여자들의 생각을 가장 크게 움직였다고 보십니까?”
“가장 크게 작동한 건 질문의 결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불편한가?’가 아니라 ‘하루 중 정확히 언제, 어떤 순간에, 왜 포기하게 되는가?’를 묻기 시작한 거예요.
불편을 묻는 질문은 흔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시간과 장면을 묻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막연한 불만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말하게 됩니다. ‘은행이 멀다’는 말 대신 ‘근무 시간이 끝나면 은행도 끝나 있어서 결국 실비 청구조차 미루게 된다’는 식의 서사가 나오기 시작해요. 이 질문 하나가 참여자들의 시선을 ‘시설 부족’에서 ‘구조적 시간 충돌’로 이동시키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활동 측면에서는 페르소나 ‘나바빠’ 씨의 하루를 시간대별로 늘어놓고 같이 들여다본 시간이 가장 컸습니다. 06:30 기상, 07:30 출근, 08:00 근무 시작, 12:00 점심, 17:00 퇴근, 18:30 집 도착… 이렇게 한 사람의 하루를 시간 축에 올려놓고, 옆에 ‘주요 공공·생활 서비스 운영시간’을 같이 적어봤어요. 은행 09:00~16:00, 병원 외래진료 09:00~17:00, 주민등록 방문민원 근무시간 내 3시간.
그 두 시간표를 나란히 놓고 봤을 때, 회의 테이블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어요. 누군가가 ‘어… 이거 다 겹치네요’라고 했고, 다른 분이 ‘그래서 평생 반차를 써왔구나’라고 받았습니다. 그때 팀원들의 생각이 ‘공간의 결핍’에서 ‘시간의 충돌’로 한 번에 이동했어요. 정책의 추상적 문제가 한 사람의 하루 안에서 시각적으로 충돌하는 걸 모두가 동시에 본 순간이었습니다.
이 활동의 힘은 단순히 ‘시간표를 그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하루를 시간 축에 놓고 보는 시선’ 자체가 평소 정책 논의에서 빠져 있는 시선이거든요. 그 시선을 한 번 가지면, 그다음부터는 다른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시간의 관점’에서 다시 보입니다. 아이디어가 더 이상 ‘좋아 보이는 생각’이 아니라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응답’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효과가 컸던 건 ‘우리 부모님/배우자/친구라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둘째 날 새벽쯤 한 분이 ‘이거 진짜 우리 아빠한테 필요한 거 아니야?’라고 툭 던졌는데, 그때부터 솔루션의 디테일이 확 깊어졌습니다. 정책의 언어가 가즉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사람들이 더 신중해지더라고요. ‘대충 그럴듯한’ 안 따위는 자기 가족에게 못 권하니까요.”
의견이 정책 제안으로 바뀐 순간
“팀의 아이디어가 ‘의견’에서 ‘정책 제안’으로 바뀐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전환점은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문제 정의가 ‘시간 격차(Time Gap)’라는 이름을 얻은 순간입니다. 그전까지는 ‘은행 가기 힘들다’, ‘병원 못 간다’, ‘관공서 가려면 반차 써야 한다’ 같은 개별 의견들이 흩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게 다 같은 문제 아니에요? 시간이 안 맞아서 못 하는 거잖아요’라고 정리하면서, 산발적 의견들이 하나의 구조적 진단 아래로 묶였습니다.
의견은 사적이고, 정책 제안은 공적이에요. 그 둘을 가르는 건 결국 ‘이게 한 사람의 불편인가, 구조의 문제인가’를 분명히 하는 작업입니다. 그전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였어요. 은행이 멀다, 병원이 부족하다, 생활 인프라가 아쉽다 같은 말은 맞지만, 정책으로 옮기기엔 너무 넓고 모호합니다. 그런데 ‘시간 격차’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의견이 진단으로, 진단이 정책 의제로 바뀌었습니다.
두 번째는 ‘맡겨줘, 부르미’의 운영 구조가 차곡차곡 채워진 순간입니다. ‘누군가 대신해 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누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지, 신뢰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개인정보나 금융정보 리스크는 어떻게 다룰 것인지, 이용 비용은 누가 부담할 것인지, 공공은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는지까지 그림이 차곡차곡 채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안에 ‘모든 행정·금융·생활 업무를 다 대신 처리해주는 만능 플랫폼’이라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건 의견이지 정책이 아닙니다. 정책이 되려면 ‘어디서부터, 어떤 범위로, 어떤 검증을 거쳐, 어떤 재원으로’가 다 답해져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의도적으로 솔루션을 좁혔어요. 수요가 가장 많은 3~5개부터 시작하고, 공공기관 인증으로 신뢰를 담보하고, 기업 복지 예산이나 지자체 지원금을 결합한 바우처·구독 모델로 재원을 풀고, 대리인 행위 관련 법적 이슈를 사전에 검토한다는 식으로요.
이 두 번이 합쳐졌을 때, 저희 발표가 다른 팀들과 다른 무게를 가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좋은 생각’이 ‘실행 가능한 제안’으로 바뀌는 건 결국 추상화(이름 붙이기)와 구체화(범위 줄이기)가 동시에 일어날 때라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럼 퍼실리테이터가 개입하지 않고 기다려야 했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분명히 있었습니다. 퍼실리테이터는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지만, 답을 대신 내주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첫날 늦은 오후의 침묵이었어요. 문제 정의 단계에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한 분은 ‘교통 인프라’가 핵심이라고 보셨고, 다른 분은 ‘근무시간의 경직성’이 진짜 문제라고 보셨고, 또 다른 분은 ‘심리적 부담(연차 쓸 때의 미안함)’이 더 본질적이라고 했어요. 짧은 시간 안에 합의를 봐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고, 솔직히 저도 ‘제가 정리해드릴까’ 하는 충동이 잠깐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제가 정리하면, 그건 제가 만든 문제 정의가 되는 거잖아요. 팀이 스스로 발견한 게 아니라요. 서비스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현장의 사람에게서 나온 문장인데, 퍼실리테이터가 좋은 말로 정리해버리면 팀은 빨리 앞으로 가는 것 같아도 사실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한 박자 기다렸어요. 그러고는 ‘지금 세 가지 의견이 다 맞다고 가정하면,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더 위의 문제는 뭘까요?’라고 한 번만 던지고 다시 빠졌습니다. 5~10분쯤 침묵과 토론이 이어졌고, 그 안에서 팀원들이 스스로 ‘시간’이라는 공통 키워드를 찾아냈습니다.
또 하나는 팀이 처음 떠올린 익숙한 해결책에 잠깐 머물러 있을 때였어요. 시설 확충, 운영시간 연장, 통합 디지털 플랫폼 같은 1차 아이디어들. 퍼실리테이터 입장에서는 ‘그건 본질이 아닙니다’라고 빨리 말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참여자가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는 기회를 잃어요. 저는 팀이 1차 아이디어를 충분히 말해보도록 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왜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왜 더 깊은 구조를 봐야 하는지 팀 스스로 납득하게 되거든요. 기다림은 비효율이 아니라, 진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마지막은 둘째 날 새벽, 발표 자료를 다듬는 단계였어요. 비주얼라이터 김나연 님과 팀원들이 화면 구성을 두고 의견이 갈리고 있었는데, 저는 그때 의도적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다른 작업을 했습니다. 발표는 결국 팀이 무대에서 책임지는 것이고, 그 책임감은 그 직전까지의 자율성에서 나오니까요. 마지막 순간까지 퍼실리테이터가 손을 대고 있으면, 발표자가 무대에서 ‘내 발표’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 자율을 보장해드리는 게 마지막 단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어요.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의 모양을 한 번 비춰주고 빠지는 것이라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두 층이었습니다
“팀이 처음에는 놓치고 있었지만, 후반에 발견한 진짜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우리 팀 역시 산단의 고질적인 문제인 ‘물리적 거리와 시설 인프라의 부족’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반에 발견한 진짜 문제는 두 층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앞서 말씀드린 ‘시간 격차로 인한 일상의 마비’였습니다. 아무리 산단 내에 좋은 시설을 유치하더라도, 작업복을 입고 라인을 지켜야 하는 근로자가 방문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라는 진실. 시간이 없는 게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자리를 비우면 동료에게 미안하고, 내 일을 처리하려 해도 결국 포기하게 되고, 그게 반복되면서 무력감이 쌓인다는 점. 이건 단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과 삶의 주도권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한 발 더 들어가서, 후반에야 발견한 두 번째 층은 ‘대행자의 자리’였습니다. 저희 솔루션은 ‘근로자의 시간을 되찾아주는 대행 서비스’였잖아요.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근로자, 서비스 이용자의 입장에서만 디자인이 진행됐어요. 어떻게 하면 더 빠르고, 더 신뢰할 수 있고, 더 저렴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 그런데 후반에 한 분이 ‘근데 이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은 누구예요?’라고 물었고, 그 질문이 솔루션의 한 축을 완전히 다시 보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대행자가 단순한 심부름 노동자로 디자인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시간을 살리려고 다른 사람의 시간을 착취하는 구조를 만드는 거예요. 그건 서비스디자인이 추구하는 ‘관계의 균형’에 어긋납니다. 그래서 저희가 솔루션을 다시 손봤어요. 대행자를 공공기관 인증을 거친 검증된 인력으로 한정하고, 표준화된 프로세스 안에서 일하도록 디자인하고, 산단 인근의 신규 일자리로 연결하는 구조로요. 그러면 산단 주변에서 일자리가 필요한 시민들의 시간이 산단 근로자의 시간을 보조하면서, 지역 안에서 시간의 순환이 일어나잖아요. 이게 후반에 발견된 진짜 문제—혹은 진짜 기회—였습니다. ‘맡겨줘, 부르미’가 단순한 편의 플랫폼이 아니라 ‘산단을 지역 서비스 생태계와 연결하는 인프라’라는 더 큰 의미를 갖게 된 게 그 시점이었습니다. 사용자 한 사람의 문제를 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안에 기업의 이익, 지자체의 재원, 지역의 일자리, 공공의 신뢰가 다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상생형 업무 환경’이라는 우리 팀의 목표가 그제서야 진짜 다층적인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다시 한다면, 네 가지가 보완되어야 합니다
“현장 기반 정책 해커톤을 다시 진행한다면 꼭 보완했으면 하는 점들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네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사전 현장 몰입 시간입니다. 1박 2일 안에 페르소나를 만들고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까지 도출하려다 보니, 페르소나의 디테일이 일부 팀원의 개인 경험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만약 사전에 각 팀이 자기 주제 영역의 실제 근로자 3~5분을 인터뷰한 자료를 가지고 행사장에 들어왔다면, 첫날 오전부터 훨씬 두꺼운 데이터를 가지고 작업할 수 있었을 거예요. ‘청년디자인리빙랩’이 이미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해커톤 직전 2~3주의 집중 인터뷰 기간을 행사의 공식 일정에 포함시키면 결과물의 질이 크게 달라질 거라고 봅니다.
둘째, 실제 ‘엔드 유저(산단 근로자)’의 직접 참여나 즉각적인 검증 세션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해커톤에서도 퍼실리테이팅을 통해 근로자의 입장에 깊이 빙의했지만, 최종 도출된 프로토타입을 현장 근로자들에게 즉석에서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 있다면 정책의 해상도가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정책을 만드는 테이블에 정책을 이용하는 ‘당사자’의 자리가 한두 곳쯤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발표 이후’의 트랙이 명확히 디자인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번 해커톤이 다른 행사들과 달랐던 건 산업부 사무관님들이 팀원으로 직접 참여하셨다는 점이고, 장관님과 산단공 이사장님이 직접 결과를 들으셨다는 점이에요. 이건 정말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발표가 끝나고 나면 그 아이디어들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트랙이 명확하지 않았어요. 어떤 팀의 아이디어는 ‘즉시 적용 가능’ 판정을 받았지만, 어떤 팀의 아이디어는 ‘장기 검토’ 판정 후 어디서 누가 검토하는지 보이지 않았고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제 검토, 예산 검토, 파일럿 디자인, 지자체 연계까지 이어지는 후속 프로세스가 붙으면 좋겠습니다. 해커톤 종료 후 3개월, 6개월, 1년 시점에 각 아이디어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 추적하는 공개 대시보드 같은 것이 있다면, 참여자들도 ‘내 이야기가 진짜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신뢰를 더 강하게 느낄 거라고 봅니다.
넷째, 실행 가능성 검토 멘토링의 강화입니다. 현장에서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지만, 정책은 결국 제도·예산·운영 주체를 만나야 움직입니다. 그래서 후반부에는 서비스디자이너뿐 아니라 법률, 행정, 운영, 재정 관점의 멘토가 조금 더 촘촘히 붙어주면 아이디어가 정책 제안으로 전환되는 속도와 밀도가 더 높아질 수 있어요. 서비스디자인이 문제를 잘 발견하게 해준다면, 그다음 단계는 그 발견을 실행 구조로 연결하는 디자인이 더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번 해커톤이 가장 잘한 일은 ‘산단의 문제를 산단 사람들이 직접 정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다음부터는 훨씬 가벼워집니다. 첫 회차의 무게를 짊어진 김경진 대표님과 한국디자인진흥원, 그리고 산업부에 감사한 마음이에요. 다음 회차에서는 이 토대 위에서 좀 더 정교한 실험들이 가능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마치며 — 시간을 되찾는 정책
이종휘 대표의 인터뷰는 산업단지 문제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로 다시 읽은 기록이다. 페르소나 ‘나바빠’ 씨의 하루를 시간표 위에 올려놓자, 문제는 은행과 병원이 멀다는 데 있지 않았다. 근로자의 근무시간과 공공·금융·생활 서비스의 운영시간이 겹치는 구조가 문제였다. 일을 하느라 내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맡겨줘, 부르미!’는 그 시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 서비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제안을 통해 산업단지가 근로자의 하루를 어떻게 제약하고 있는지가 드러났다는 점이다. 산단은 생산시설이 모인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병원에 갈 시간, 서류를 처리할 시간, 가족의 일을 챙길 시간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생활의 조건이기도 했다.
그가 제안한 ‘근로자 시간 영향 평가’는 이 인터뷰이 도달한 구체적인 정책 언어다. 산업단지 정책은 이제 시설을 얼마나 더 넣을 것인가만 물어서는 부족하다. 어떤 정책이 근로자의 하루에서 몇 분을 가져가는가, 혹은 몇 분을 돌려주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일을 하느라 내 일을 못 하는 사람이 줄어들 때, 산업단지는 비로소 일터이자 삶의 터에 가까워진다.
정리 :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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