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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그림을 그리러 갔다가, 길을 그리게 됐습니다 -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 비주얼라이터 권동현

그림을 그리러 갔다가, 길을 그리게 됐습니다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 비주얼라이터 권동현 인터뷰

 

 

해가 지면 산업단지는 고립된 섬이 된다.

 

낮 동안의 활기는 사라지고, 인적이 끊긴 거리에는 어둠만 남는다. 20대 여성 근로자는 야간 퇴근길 미로 같은 공장 사이에서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낯선 이와의 예기치 못한 마주침은 큰 심리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실제 범죄율보다 더 큰 문제는 근로자들이 느끼는 심리적 불안이다. 산단의 밤은 사람이 빠져나간 뒤 어둠 속에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되어버렸다.

그 어둠 속에서 펜을 든 사람이 있었다. 이미지로 이야기를 만드는 비주얼스토리텔러이자 작가, 권동현이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왔다. "그림만 멋지게 그리면 되겠구나."

1박 2일이 지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경험은 저 자신에게도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바꿨는가. 권동현을 만났다.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이 되는 자리 —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

 

2026년 4월 17일부터 18일까지, 충남 예산 스플라스 리솜에서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이 열렸다. 산업통상부가 주최하고 한국산업단지공단과 한국디자인진흥원이 공동 주관한 이 행사에는 창원·완주·구미 산단의 청년 근로자 60여 명과 지역 주민, 공무원, 전문가 등 약 100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완주 산단의 한 청년 근로자가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현장의 문제를 직접 꺼내고 해결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고, 그 제안에 공감한 장관이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총 10개 팀에 산단 근로자, 지역 주민, 산업통상부 사무관이 함께 팀원으로 참여했고, 각 팀마다 전문 서비스디자이너인 퍼실리테이터와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비주얼라이터*가 한 명씩 배정됐다. 탁상에서 설계된 정책이 아니라, 매일 산단을 살아가는 근로자의 시각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찾자는 취지였다.

비주얼라이터(Visual Writer)는 아이디어나 콘셉트를 글과 그림(시각 요소)을 통해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전문가를 의미한다. 해커톤이나 정책 기획 과정 등에서 퍼실리테이터와 협업하여, 참가자들의 토론 내용을 실시간으로 시각화하여 문제 정의 및 아이디어 구체화를 지원한다. 

 

왕산단 팀의 '산단지기' — 어둠을 밝히는 등대

 

권동현이 비주얼라이터로 참여한 팀은 '왕산단'이었다. 팀이 주목한 것은 산단의 밤이었다. 야간 퇴근길의 심리적 불안, 쉴 공간 없이 누적되는 피로, 지역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 산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매일 감당하는 문제들이었다. 팀의 해법은 등대지기에서 착안했다. 산단 내 방치된 유휴 건물을 지상 7층 복합 거점으로 바꾸는 것 — 이름은 '산단지기'였다.

1층은 소음과 분진, 악취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클린존, 2층은 숙련 기술자와 청년 창업가가 만나는 지식 공유 플랫폼, 3~4층은 창업 인큐베이팅 공간, 5층은 협업과 교류가 이루어지는 코워크 오피스, 6~7층은 야간 근무자를 위한 안심 숙박 공간, 옥상에는 실시간 대기질과 소음 정보를 제공하는 에코 알리미와 등대 조명이 산단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팀이 전하려 한 메시지는 '산단의 밤이 더 이상 혼자 감당해야 할 어둠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보드 위에 그림으로 옮기는 것이 권동현의 일이었다.

 

인터뷰 — 권동현이 말하는 전환점

 

 

권동현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디자인경영 석사 · 비주얼스토리텔러 · 작가

 

이제, 그림만 멋지게 그리면 되겠구나

 

그는 비주얼스토리텔러다. 복잡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쉽고 흥미롭게 풀어내는 일을 해왔다. 그러니 이번 해커톤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잘 그리면 된다고.

"처음 이 해커톤에 참여한다고 들으셨을 때, 솔직히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해커톤에 참여하기 전에는 아이디어 그림만 멋지게 그리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분야의 사람들과 팀을 이루어 협업한다는 점에 기대도 컸습니다."

그가 생각한 비주얼라이터의 역할은 결과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팀 안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뭔가 달랐다.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행사 전에는 산업단지를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국가 산업지대로만 생각했습니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 주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봐야 한다. 산단을 국가 산업지대로만 보던 시선이, 팀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왕산단 팀의 주제는 야간 안전이었다. 야간 퇴근길의 불안, 쉴 곳 없는 교대 근무자, 지역사회와 단절된 고립. 숫자로 보이던 산단이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진짜 산업단지 현장의 문제다'라고 느끼신 순간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산업단지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고 삶의 터전입니다. 산업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다시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게 됐다.

 

답을 정하지 않았기에, 답이 나왔다

 

팀원들의 이야기가 쌓일수록 그림의 방향이 잡혀갔다. 그런데 그 과정은 그가 익숙하던 방식과 달랐다. 완성된 기획을 시각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형태가 없는 것들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서비스디자인 방식이 일반 회의나 일반적인 워크숍과 다르게 느껴진 지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답을 정해놓지 않고, 새로운 곳에서 처음 만난 팀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목표를 갖고 함께 풀어나가는 일 자체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만큼의 결과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답이 없는 상태에서 함께 답을 만들어가는 것. 서비스디자인이 일반 워크숍과 달랐던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팀의 색깔이 그림 위에 나타나던 순간

 

"처음 팀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가장 표현하기 어렵다고 느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팀의 주제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아이디어가 나오거나,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느껴지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수용하고 그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말이 흩어진 채로는 팀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림이 그려지자 방향이 보였다. 그것이 두 번째 전환점이었다.

"말로 흩어져 있던 아이디어가 그림으로 정리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느끼신 순간이 있었다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입장과 생각이 더해지면서, 흐릿했던 아이디어들이 그림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팀원 모두가 같은 그림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팀의 색깔과 방향이 드러났습니다."

말이 흩어진 채로는 팀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림이 생기자 팀이 보였다. 그것이 두 번째 전환점이었다.

 

AI보다 소중했던 것

 

요즘은 AI로 누구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비주얼라이터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비주얼라이팅이 팀원들의 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요즘은 AI를 통해 누구나 아이디어를 시각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팀원들과 소통하며 직접 구체화하는 과정은 무엇보다 소중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지가 다소 부족할 수는 있지만,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주제에 대해 서로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과정은 길었지만 결국 더 빠르게 최종 결과물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완성도 높은 이미지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팀을 하나로 묶었다.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 힘이었다.

"정책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표현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업 아이템이 아닌 정책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것은 더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특정 대상에게 단순히 더 나은 것, 좋은 것을 제안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후에 국민 전체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먼저다

 

"이 해커톤 이후 산업단지 정책이 달라져야 한다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산업단지는 국가의 중요한 핵심 역량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산업단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업단지를 존중하고, 그곳에 거주하는 분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인식 개선 정책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국가 산업지대로만 보던 시선이, 1박 2일 동안 완전히 달라졌다. 산단의 경쟁력은 수치로 말해진다고 생각했다. 생산량, 수출액, 고용률. 그러나 현장의 목소리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비주얼라이터로서의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이번 해커톤을 한 장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무엇을 그리고 싶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피라미드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처음 돌을 하나씩 쌓을 때는 그냥 바위 덩어리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힘을 합쳐 완성한 후에는 역사에 남을 랜드마크가 됩니다."

 

마치며 — 바위가 랜드마크가 되는 순간

 

그는 이번 해커톤을 한 장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피라미드를 그리겠다고 했다. 처음 돌을 하나씩 쌓을 때는 그냥 바위 덩어리다. 그런데 모두가 힘을 합쳐 완성한 후에는 역사에 남을 랜드마크가 된다. 그는 1박 2일 동안 그 피라미드를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리는 동안 뭔가를 깨달았다. 바위 하나하나를 잇는 과정 자체가 자신의 일이었다는 것을. 멋진 그림이 아니라, 함께 쌓아가는 과정이.

"그림만 멋지게 그리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왔던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는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제 스스로 앞으로 그려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산단지기는 어둠 속에 등대를 세우려 했다. 등대는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해커톤 1박 2일이, 그에게도 하나의 방향을 가리켜주었는지 모르겠다. 

 

정리 :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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