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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부심도 그릴 수 있을까? -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 비주얼라이터 김민채

자부심을 그릴 수 있을까?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 비주얼라이터 김민채 인터뷰

 

대한민국 제조업의 63%가 산업단지에서 나왔다. 지역 경제를 일으키고, 수출을 이끌고, 수십만 명의 생계를 지탱해온 공간. 그러나 정작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굴뚝과 소음, 매연과 단절이다. 기여는 컸지만 자부심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여기서 계속 살고 싶지 않다고 했고, 누군가는 자식을 낳아 키우고 싶은 곳이 아니라고 했다. 지역 산업을 일으켰던 바로 그 지역 주민들의 말이었다. 테이블 옆, 커다란 폼보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토론에 끼지 않았고 손을 들지도 않았다. 대신 귀를 열고, 펜을 움직였다. 말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보드 위에 점이 쌓이고, 선이 생기며 어느 순간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그림이 됐다. 비주얼라이터는 생각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다. 퍼실리테이터가 대화의 흐름을 이끈다면, 비주얼라이터는 그 흐름이 눈에 보이는 형태를 얻을 때까지 보드 앞을 지킨다. 이번 해커톤에서 김민채가 맡은 역할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역 산업을 성장시킨 근거지로서의 산단의 자부심도 눈에 보이게 할 수 있었을까? 비주얼라이터 김민채를 만났다.
비주얼라이터(Visual Writer)는 아이디어나 콘셉트를 글과 그림(시각 요소)을 통해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전문가를 의미한다. 해커톤이나 정책 기획 과정 등에서 퍼실리테이터와 협업하여, 참가자들의 토론 내용을 실시간으로 시각화하여 문제 정의 및 아이디어 구체화를 지원한다.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이 되는 자리 —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

 

2026년 4월 17일부터 18일까지, 충남 예산 스플라스 리솜에서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이 열렸다. 산업통상부가 주최하고 한국산업단지공단과 한국디자인진흥원이 공동 주관한 이 행사에는 창원·완주·구미 산단의 청년 근로자 60여 명과 지역 주민, 공무원, 전문가 등 약 100명이 모였다. 이 행사는 완주 청년 근로자가 산업부 장관에게 건의해 실행되었다. 총 10개 팀에 산단 근로자, 지역 주민, 산업통상부 사무관이 함께 팀원으로 참여했고, 각 팀마다 서비스디자이너인 퍼실리테이터와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비주얼라이터가 한 명씩 배정됐다. 정책 수요자와 정책 담당자, 이해관계자가 한 팀이 되어 현장의 소리 속에서 진짜 문제를 공감하고 창의적으로 풀어내는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을 활용했다. 

"왜 산단 근로자들은 자신의 일터에 자부심을 느끼지 못할까?" 10개 팀 중 케더산(K더하기산단) 팀이 주목했던 질문이 이것이었다. 대한민국 경제의 63%를 책임지는 공간이지만, 정작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장 노동자'라는 사회적 편견 속에 스스로를 가둬왔다. 주민들은 산단을 매연과 소음의 발원지로 오해하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직장을 감추고 싶어 한다. 팀이 찾아낸 핵심 원인은 자부심의 결핍이었다. 그 해법의 이름은 '썸단' — 산단과 썸을 탄다는 뜻이다. 산단과 지역사회가 조심스럽게 마음을 여는 3단계 과정을 담았다.

1단계는 오해를 푸는 것이다. 지자체장과 환경 전문가가 참여하는 타운홀 미팅으로 주민의 불안을 해소하고, 산단 유튜버와의 협업으로 첨단화된 산단의 일상을 브이로그로 공유한다.

2단계는 인정받는 것이다. 2~3대째 산단에서 근무하는 가문을 예우하는 '산업단지 명문가' 제도, 은퇴 숙련 기술자를 '산업단지 명장'으로 임명하는 제도를 도입한다. 지역 거점 대학과 연계한 AI 아카데미로 근로자가 첨단 산업의 핵심 인재로 성장할 기회를 국가가 보장한다. 3단계는 함께하는 것이다. 기존의 '산단의 날'을 '썸단의 날'로 개편해 낮에는 채용 박람회를, 밤에는 나이트런·로봇 푸드코트·EDM 축제를 연다. 산단을 청년들이 즐기고 싶어하는 '힙한' 공간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팀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K-산단의 발전에서 그동안 빠져있던 핵심은 바로 사람, 그리고 사람의 자부심이었다." 

이 팀의 비주얼라이터가 김민채다.

 

 

인터뷰
김민채가 말하는, 자부심을 그리는 일

 

 
김민채 비주얼라이터. 경희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박사 재학중
 


해커톤이 시작되기 전, 이미 해커톤에 흠뻑 빠져들다


그녀는 경희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박사과정에서 디자인씽킹을 연구하고 있다. 비주얼라이터로서 이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여하기로 했다. 공식 행사는 1박 2일이었지만 김민채의 해커톤은 그보다 훨씬 일찍 시작됐다. 그녀는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약 일주일간 해커톤에 흠뻑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행사 전날에는 팀원들을 "피식하게 만들" 일러스트를 만들었고, 리허설 내내 긴장을 안고 말차하임 다섯 개를 먹으며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처음 이 해커톤에 참여한다고 들으셨을 때, 솔직히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처음에는 부담이 컸습니다. 비주얼라이터라는 역할 자체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복잡한 생각과 감정, 그리고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빠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내야 하는 역할이라고 느꼈습니다. '내가 과연 이걸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컸습니다. 행사 전날까지도 그림 연습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쁜 그림, 특색 있는 그림체로 그리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생각을 더 정확하게 읽고, 더 따뜻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했습니다. 원래 개인적인 성격과 특성상 고민 걱정이 많은 편이라 부담감도 컸지만, 동시에 좋은 디자이너이자 연구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경험이라는 생각으로 참여했습니다."

 

산업단지, 나의 삶과 거리가 먼 공간


행사 전날, 그녀는 버스를 잘못 탈 뻔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호남선이 아닌 경부선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 시간이 다 되어서야 알아채고 태어나서 제일 빠르게 뛰었다고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작된 1박 2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는 산단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행사 전에는 산업단지를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산업단지는 제 삶과는 다소 거리가 먼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산단'이라는 용어 자체도 굉장히 딱딱하고 차갑게 느껴졌고, 기계와 공장, 반복적인 노동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저 역시 사회 안에 존재하던 산업단지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해커톤 행사에 참여하며, 산업단지 역시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점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 안에도 누군가의 하루가 있고, 고민이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이 고루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달으며 기존의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해커톤 행사 자체가 산업단지에 대한 인식 개선에 기여한 행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이번 해커톤에 참여한 관계자분들, FT, VW, 수행사 및 협력기관 등의 외부 이해관계자 분들께서는 산업단지를 단순한 생산 공간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 공간의 가능성과 사람들의 열정을 느끼셨을거라 생각합니다."

 

흩어진 파편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던 순간


세션이 시작됐다. 팀원들의 말이 쏟아졌고, 그녀는 보드 앞에서 말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포스트잇에 받아 적고, 보드 위에 붙이고, 관계를 연결했다.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펼쳐졌다.

"1박 2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은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세션 1과 2 초반부였습니다. 처음에는 팀원분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현장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굉장히 산발적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청년 유입의 어려움, 산업단지의 노후화, 부정적인 이미지, 자부심의 부족 같은 이야기들이 복잡하게 느껴졌습니다. 비주얼라이터로서 참가자분들의 대화를 계속 듣고, 관계를 연결해가며 보드 위에 하나씩 구조화하기 시작하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흩어져 있던 문제들을 어피니티 다이어그램(affinity diagram)으로 그룹화하고 연결해 보니, 저희 팀에서 도출된 내용들이 하나의 큰 문제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산업단지에는 미래가 없다고 느끼는 감각.'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조차 자부심을 느끼기 어려운 상태.'... 

저는 그 순간이 굉장히 강렬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문제의 파편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장면을 눈앞에서 마주했을 때, 마치 서비스디자인의 첫 단추를 바르게 꿰어낸 것 같다는 성취감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정보를 정리했다기보다, 서비스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과 경험 속에 숨어 있던 구조를 발견해낸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산업단지에 미래가 있을까?


보드 위에 그림이 생겨날수록, 문제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윤곽의 한가운데에는 자부심이 있었다. 지역 산업을 성장시킨 근거지의 자부심이, 정작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자부심은 보이지 않기에, 보이게 만들어야 했다. 그게 케더산 팀의 과제였고, 동시에 비주얼라이터의 과제였다. 

"'이건 진짜 산업단지 현장의 문제다'라고 느끼신 순간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팀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팀원분께서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산업단지에는 미래가 없는 것 같아요." "나중에 여기서 자식을 낳고, 여기서 키우고 싶을 것 같진 않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산업단지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선명하게 다가온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실제로 산업단지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 이미 그 부정적인 인식을 체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에는 미래가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공기 자체, 차갑고 단절된 감각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속한 공간에 대한 자부심과 가능성을 느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산업단지가 누군가에게는 '머물고 싶지 않은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깊게 다가왔습니다. 실제 산업단지 내부 이해관계자를 통해 부정적 이야기들과 문제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는 암흑처럼 어두운 느낌과 이미지가 각인되었던 것 같았기에, 그 부분이 문제를 가장 생생하게 인식한 순간인 것 같습니다."

"처음 팀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가장 표현하기 어렵다고 느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중심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선별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비주얼라이팅은 단순히 들은 내용을 예쁘게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흐름과 문제를 함께 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경계했던 것은 제 개인적인 해석이 과도하게 개입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더 눈길이 가는 문제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만약 그 감각만 따라가 버린다면 제가 꽂힌 문제 위주로 구조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정작 초반에 반드시 발견되어야 할 '진짜 문제'를 놓칠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계속 스스로를 돌아보려 했습니다. '내가 이 참가자분의 말을 너무 내 방식대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정말 이 흐름이 팀 전체의 공감에서 나온 것일까.' 

디자인씽킹에서 말하는 '공감'이 단순히 상대를 이해했다고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경계하려는 태도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경험은 비주얼라이터로서의 기술보다도, 사람의 이야기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말은 흘러가지만, 그림은 멈춰 세운다


집중력이 떨어질 무렵, 팀은 돗자리를 깔고 바닥에 앉았다. 과자를 먹으며 서로의 아이디어에 살을 붙였다. 자세를 바꾸자 대화가 다시 살아났다. 그 흐름을 보드 위에 옮기면서 그녀는 무언가를 알아챘다. 그림이 생겨날수록 대화가 깊어졌다.  

"말로 흩어져 있던 아이디어가 그림으로 정리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느끼신 순간이 있었다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확산과 수렴은 마치 동전의 앞 뒷면 같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확산되지 않으면 깊이 있는 문제를 발견할 수 없고, 반대로 수렴되지 않으면 결국 아무 방향도 잡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흐름을 보드 위에 시각적으로 하나씩 드러내는 과정에서, 팀원분들은 지금 우리가 무엇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 문제와 저 문제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결국 이 흐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시각화로 인해, 추상적이고 막연했던 것들이 더 많은 대화거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특히 문제들을 그룹화하고, 큰 흐름 안에서 맥락과 관계를 짚어가며 ‘진짜 중요한 문제’를 좁혀가던 순간들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이후 해결 아이디어를 확산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모든 과정에서 시각화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팀원들이 함께 이해하고 사고의 흐름을 공유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처럼 작동했습니다. 즉, 몸통보다 더 큰 보드를 위에서 아래로 채워나가던 그 과정 자체가, 마치 팀의 집단 사고가 눈앞에 형체를 얻어가는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비주얼라이팅이 팀원들의 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비주얼라이팅은 단순히 대화를 정리하는 역할을 넘어, 팀원들이 서로의 생각을 '함께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순간적으로 흘러가지만, 시각화된 내용은 모두가 다시 멈춰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말도 포스트잇에 써 붙이고 보드 위에 구조와 관계를 가진 형태로 나타나는 순간, 또다른 대화들을 촉진한다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시각화된 내용을 본 일부 팀원분들은 다시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거나 더 깊게 이야기했습니다. 

"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사실 이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이 문제랑 저 문제가 연결되는 것 같네요." 이런 대화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결국 비주얼라이팅은 팀원들의 사고를 다시 순환시키고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순간들을 보며, 시각화라는 행위가 단순한 표현 기술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를 함께 움직이게 만드는 언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추가로, 이러한 시각화에 앞서 대화의 흐름을 주도해주시고 맥락을 연결해주신 FT선생님과의 끈끈한 협력이 저의 비주얼라이팅 및 대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FT선생님의 전문적이고 친근한 리드 덕분에, 시각화의 방향성 또한 더 명확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비스디자인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루는 방식이 아닐까?


밤이 깊어졌다. 발표 장표를 만들기 위해 다시 모였다. 해가 뜨는 것을 실시간으로 봤고, 창밖에서 새가 짹짹거렸다.
그 새벽을 버티면서 그녀가 내린 결론은 방법론이 아니라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가 늘 내세우던 디자인 철학이 다시 확인됐다. 디자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기술이라면, 그 기술은 결국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것.

"서비스디자인 방식이 일반 회의나 일반적인 워크숍과 다르게 느껴진 지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보통 회의나 세미나라고 하면 정제되고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번 해커톤은 그런 긴장감보다는, 활기와 웃음 속에서 유연한 사고를 실천하는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인간은 결국 상호작용 속에서 마음을 열고, 즐거움을 느낄 때 더 깊이 있고 적극적으로 사고하게 되는 존재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따뜻한 반응이 오가던 해커톤 현장에서는, 단순히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보다도 '함께 더 좋은 방향을 찾고 싶다'는 내적 동기가 훨씬 커졌던 것 같습니다. 서비스디자인이 단지 창의적 방법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정책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표현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시각화 주체는 다양한 삶과 경험을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분야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표현할 때는 생각보다 쉽게 편향이 개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책과 관련된 문제는 실제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피상적인 이해만으로 접근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미지가 만들어질 위험도 크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지금은 AI나 다양한 디지털 툴의 발전으로 표현 자체를 도와주는 기술들은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깊이 있는 그림은 결국 깊이 있게 사람을 이해하려 했던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보고,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오래 고민해본 사람이 그리는 그림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의 온도나 감정이 자연스럽게 담길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단순히 표현 기술만 발전시키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사람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는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책이 달라지려면, 인식 변화가 먼저다


"이 해커톤 이후 산업단지 정책이 달라져야 한다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먼저 변화해야 하는 것은 산업단지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단지는 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하는 굉장히 중요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에게 산업단지는 여전히 낡고 어두운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행사 참여 전의 저 또한 그랬고요. 문제는 이런 시선이 외부 사람들만의 인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 구성원들의 자부심에도 영향을 준다는 점입니다. 산업단지 정책이 물리적 환경 개선에만 머무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이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간에 미래가 있다고 느낄 때, 그 안에서 성장하려는 마음도 생긴다고 믿습니다."

그녀에게 비주얼라이터로서의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이번 해커톤을 한 장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무엇을 그리고 싶으신가요?"

"거대한 산업단지 위에 아주 작은 불빛들이 하나씩 켜지고 있는, 그러한 배경 위에서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는 장면을 그리고 싶습니다. 팀별로 정말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도출해 주셨지만, 궁극적으로 모두가 '밝음'으로 향하는 아이디어들을 제시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생각들, 이야기들은 흩어진 선처럼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FT와 VW를 비롯한 팀원들의 말 한마디, 누군가의 공감, 또 누군가의 질문을 계기로 선들은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대한 산업단지의 차갑고 어두운 풍경 위로, 사람들의 대화가 만든 빛의 흐름이 천천히 이어지는 장면을 그리고 싶습니다. '미래가 없다고 느껴졌던 공간' 안에서도,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할 때 다시 가능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한 시간이었습니다. 거대한 의미 부여가 아니라, 실제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해커톤을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보다도, 어두운 공간 속에서 작은 불빛들이 연결되기 시작하던 과정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활동을 통해 하고 계신 디자인에 대해서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앞으로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지 궁금합니다."

"저의 디자인철학이자 제가 늘 내세우는 슬로건(?)이 있는데요, ‘디자인은 결국 사람을 향해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단순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번 해커톤을 통해 그 생각이 더 깊어졌습니다. 디자인씽킹을 실천함에 있어, 그리고 문제 해결 취지의 어떤 행사가 진짜 의미를 갖게 되는 데에 있어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얼마나 진심으로 들으려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진정성에 기반한 소통과 상호작용이 있어야 서로의 감정과 맥락을 섬세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동반될 수 있다는 것도요.

그래서 앞으로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를 오래 듣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책상 앞에서 관찰하고 연구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현장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삶과 고민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각종 사회 문제를 다룰수록 사람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조심스럽다는 것을 계속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더 좋은 디자인씽킹 연구자이자, 따뜻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꾸준히 고민하고 배우고 싶습니다."


마치며 — 보이게 만들어야 존재한다

 

이제 산단의 풍경은 그녀가 막연히 품고 있었던 산단의 이미지와는 달라졌다. 차갑지 않았고, 단절되지 않았다. 사람이 있었고, 대화가 있었고, 빛이 있었다.

비주얼라이터는 팀의 말을 그림으로 바꾼다. 그 과정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자신의 해석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현장이 말하는 것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케더산 팀이 찾아낸 문제도 같은 구조였다. 지역 산업을 성장시켜 온 산단의 자부심은 오랫동안 시간이 흐르며 퇴색되었다. 아무도 그것을 보드 위에 올려놓고 연결하지 않았다.

흩어진 점들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될 때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것처럼, 자부심도 보이게 만들어야 느낄 수 있다.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찾아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기술이다. 산단 근로자의 자부심이 하나의 형체를 얻게 하는 일, 바로 그 일이 지금 디자인에게 주어진 과제다.


 

관련 자료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 현장 리포트 → designdb.com

케더산 팀 발표자료 '썸단' → designdb.com

해커톤 취재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4V0yT_kZKo 
디자인씽킹 실천의 장; 산업단지 정책 해커톤에 다녀왔습니다. - 김민채 

 

정리 :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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