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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연결과 정체성, 그리고 지속가능성: 문화선도산단의 새로운 실험 - 정재희 완주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 자문위원

문화선도산단 사업은 산업통상부·문화체육관광부·국토교통부 등 관계 부처가 연계해 산업단지의 공간·문화·생활 기반을 함께 전환하려는 정책 사업이며, 청년디자인리빙랩은 청년의 경험에서 출발해 아이디어를 프로토타이핑하고 현장에서 검증하는 실행 장치로 작동한다. 이 글은 완주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 디자인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정재희 홍익대학교 교수가 특정 산업단지의 사례 소개를 넘어, 문화선도산단이 성과로 이어지기 위한 핵심 조건을 ‘연결·정체성·지속가능성’이라는 세 가지 가치로 정리한 글이다.

 

 

[기고] 연결과 정체성, 그리고 지속가능성: 문화선도산단의 새로운 실험

정재희 

완주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 자문위원

홍익대학교 교수

 

대한민국은 높은 수준의 제조업 역량을 기반으로 세계 10위 권 안팎의 경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제조 역량은 고도의 기술력과 공정 관리 능력, 빠른 대응 속도, 촘촘한 협력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세계 최상위권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2025년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의 한미 관세 협상 과정에서 조선업을 비롯한 제조업은 중요한 협상 카드로 기능하며, 한국 제조업이 단순한 수출 산업을 넘어 국제 정치·안보 질서 속 전략적 자산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제조 경쟁력의 물리적 기반이 바로 산업단지이다. 우리나라에는 약 1,300여 개의 산업단지(국가 50여 개, 일반 730여 개, 도시첨단 40여 개, 농공 480여 개)가 전국 곳곳에 조성되어 있다. 산업단지는 한국 경제의 성장과 고용, 기술 축적을 떠받쳐 온 구조적 기반이며, 과거 성장기의 유산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전략 자산이다. 따라서 산업단지는 국가 경쟁력의 지속 가능성을 다루는 일과 직결되어 있다.


2025년 산업통상부, 문화체육관광부, 국토교통부가 협업하여 산업단지에 문화적 요소를 더해 산업단지를 노동·생활·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전환하려는 문화선도산단 사업을 추진하였다. 문화선도산단 사업은 청년과 기업을 유입하고 지역 활력을 제고함으로써, 산업단지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매우 뜻깊은 범부처 융복합 사업이다. 2025년 사업 첫 해 8개의 산단이 문화선도산단 사업에 지원하였고, 그 중 구미, 창원, 완주 산단이 선정되어 4년 간 랜드마크 조성, 노후공장 청년친화 리뉴얼, 아름다운 거리 조성, 문화가 있는 날, 산단 청년공예 오픈스튜디오, 문화 브랜딩 등의 세부 사업을 추진하며 문화선도산단으로의 변화를 추진 중이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서비스디자인 전문기업과 함께 구미, 창원, 완주 산단의 청년 근로자를 대상으로 리빙랩을 운영하며, 문화선도산단의 밑그림을 그리고 최소기능제품(MVP, Minimum Viable Product)를 만들어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고 있다. 필자는 디자인 전문가로서 산업단지 및 서비스디자인 전문기업 선정과 자문에 참여하며 느낀 지난 1년 간의 소회를 이 자리를 빌려 간략하게 나누고자 한다. 

먼저 문화선도산단 사업의 구조는 매우 바람직하다. 정부와 지자체가 리더로서 산단의 문제를 인식하고, 산단의 주체인 청년이 스스로 문제의 원인을 찾으며, 디자이너가 그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해결책을 제안하는 방식은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는 구조적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산단의 미래 경쟁력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 청년과 기업의 유입이 필요하다는 문제 인식은 실질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동안 정부와 지자체는 시설을 보완하고, 문화 행사를 기획하고, 편의 기능을 확충하는 등 산업단지의 물리적 환경 개선과 프로그램 공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정책은 실재 수요자인 산단 근로자의 니즈보다는 정책 공급자의 입장에서 제공되어 왔다. 그러나 문화선도산단 사업은 현장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청년들이 청년 리빙랩에 참여하여 자신이 겪는 불편과 어려움을 호소하고, 스스로 해법을 찾아간다. 디자이너는 이러한 청년 근로자의 잠재적 니즈를 새로운 관점에서 프레이밍하고, 창의적 해결책을 MVP로 구현하여 청년 리빙랩을 통해 검증하고 확산한다.
이는 청년 근로자의 필요를 유추해서 시설과 환경을 개선하는 탑다운(Top-down)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 청년 근로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주변의 전문가가 조력하는 바텀업(Bottom-up) 방식의 접근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필자는 이러한 상호소통의 접근 방식이 문화선도산단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가치로서 연결, 정체성, 지속가능성을 강조하고 싶다. 


먼저 연결이다. 많은 산업단지가 물리적으로는 도시 안에 존재하지만, 심리적·사회적 차원에서는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 일터와 주거, 산업과 지역사회, 내부 구성원과 외부 시민은 서로 단절되어 있다. 문화산단 사업은 이 고립을 해소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산업단지와 도시의 연결은 대중 교통을 강화함으로써 산업단지가 도시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도시에는 이미 경쟁이 불가능할 만큼 풍부하고 수준 높은 문화 콘텐츠가 존재하기 때문에, 산단이 자체적으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기보다는 언제든 지역의 상권, 대학, 문화 공간, 커뮤니티와 연결될 수 있도록 대중 교통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외 산업단지가 보유한 공간과 인프라 자산을 개방하고, 외부의 풍부한 콘텐츠와 비즈니스 역량을 유입함으로써 서로의 자산을 교환·확장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외부의 사람들이 산업단지를 낯선 공간이 아니라 경험 가능한 장소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창의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정체성이다. 산업단지에는 이미 오랜 시간 축적된 기술, 노동의 기억, 산업적 맥락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부심으로 해석되지 못할 때, 공간은 단순한 생산 시설로만 남게 된다. 문화산단의 목표는 외부의 화려한 콘텐츠를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업단지 내부의 문화를 재해석하는 데 있다.
이미 중국 베이징의 798 예술구, 독일 에센의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 에센, 부산의 F1963은 낡은 공장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대표적 사례이다. 디자인은 산업단지 건물의 높은 천장, 거친 콘크리트 벽, 산업 설비의 흔적을 서사적 자산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경험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내부 구성원과 외부 시민을 위한 체류, 휴식, 교류를 위한 산업 단지 내 문화 공간을 ‘이곳만의 이야기’로 디자인하여 자부심의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속가능성이다. 산업단지는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는 복합 공간이다. 기업, 노동자, 청년, 지역 주민, 지자체, 중앙정부 등 각자의 요구와 이해가 다르다. 이 중 어느 한 집단만을 중심에 둔 변화는 오래가기 어렵다. 문화산단 사업이 일회성 이벤트나 단기 사업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의 이익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 모두가 혜택을 누리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기업에게는 인재 유입과 조직 활력이라는 가치가, 청년에게는 삶의 질과 성장 기회가, 지역사회에는 경제적·문화적 파급 효과가 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균형 위에서 작동하는 모델만이 지속 가능하다.


청년디자인리빙랩은 실험과 검증을 통해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반응을 확인하고 조정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다. 문화선도산단 사업은 처음부터 완성된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 작은 시도를 반복하면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균형점을 찾아감으로써 지속가능한 성공 모델을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선도산단 사업은 산업단지를 단순한 생산의 공간이 아니라, 노동과 삶, 문화가 교차하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이다.
제조 경쟁력이 국가 전략 자산이라면, 산업단지의 재해석은 그 전략 자산의 미래 가치를 설계하는 일이다. 연결을 통해 고립을 해소하고, 정체성을 통해 자부심을 회복하며, 구조적 균형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만드는 일은 단기적 성과를 넘어 산업단지의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디자인은 이 전환의 과정에서 단순한 미적 수단이 아니라, 산업단지의 의미를 재구성하며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전략적 도구로 기능할 것이다. 문화선도산단 사업은 산업단지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하는 혁신적 실험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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